고구려를 위하여 1 김병호 씀 하서출판사 책머리에 이 소설은 천 년 전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의 한 맺힌 세월과 그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멸망시킨 당나라의 심장부에 독립 왕국을 세워 고구려의 민족혼을 이어나간 잊혀진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민족의 5천 년 역사 중 가장 자랑스러웠던 동방의 패자 고구려. 그 시절의 웅대한 찬란했던 우리의 민족사를 중국과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극도로 비하시켜 놓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 중 북부와 드넓은 요동벌을 모두 차지하고서 수나라를 망하게 했던 고구려가 한낱 남생, 남건, 남산의 형제 다툼으로 하루아침에 망해 버릴 수가 있는가. 저자는 왜곡된 고구려사를 원상 회복시킨다는 일념으로 지난 3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역사소설이란 적어도 기본 줄거리만큼은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적인 양심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고서 속에 파묻혀 끈적끈적한 여름밤을 지샜으며, 또 소설 무대의 분위기를 사실감 있게 그리기 위해 7번씩이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저자는 비록 소설 형식을 빌려 썼지만, 읽은 재미가 다소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자라나는 세대들이 역사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주요한 사건을 고증을 해가며 집필했음을 밝혀 둔다. 소설 자료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나타난 이정기 장군, 그는 과연 누구였던가.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불운한 삶을 마쳐야 했던 고구려 포로의 자손들 가운데 훗날 톈산산맥을 넘어 서역을 정벌한 고선지와 무열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와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사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인이었다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가게 한 주인공이다. 그가 당나라로부터 빼앗은 영토는 지금의 요녕성 일대, 산동 반도와 하북성 남부 그리고 안휘성 북부 일대였으며 그가 지배한 인구수는 평소까지 합쳐 옛 고구려보다 더 많은 130만여 호나 되었다.(패망 당시의 고구려 인구는 69만호). 우리 민족이 이처럼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서 나라를 세웠던 일은 국조 단군 왕검 이래 처음 있었던 민족의 쾌거였다. 특히 이정기 장군이 유달리 돋보이는 것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아 온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은 국내에서 지원을 받으며 외세를 물리쳐 나라를 구했지만,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가 망한 지 10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힘을 길러 당나라에 대적했다는 것이다. 민족사적으로 보면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에 버금갈 만큼 큰 영웅이었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한 민족의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가 어찌하여 1200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었을까? 아마도 중국을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일부 못난 선조들 탓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을 침략해서 땅을 빼앗고, 역적질을 한 이정기라는 인간이 하필이면 동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세상도, 의식도 변했다. 한반도 안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그 누구도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의 혼을 가지고 당나라에 대적했던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비로소 역사 속에 잊혀져 가던 민족의 큰 영웅 한 분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할 시대적 과업이 우리에게 지워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교육부에서 발간한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마저도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이정기 장군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다. 이제부터라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민족사를 가르치고 긍지와 자부심을 키워 주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에 당해만 왔던 약자로서의 한국 역사가 아니라 이정기 장군이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던 적극적인 역사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친일을 했던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일부 사학자들이여,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의 유사한 역사물과 민속을, 그들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북방기원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왜곡시키지 마라. 그것들 대부분은 당나라로 끌려갔던 우리 동포들의 피와 땀이 밴 유산이 아직도 한 점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우리 민족의 발해사와 고구려의 역사가 자기네들 것이라고 어거지를 부리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강토가 자기네들의 것이고, 따라서 언젠가 우리 나라를 침략해서 되찾아야겠다는 명분을 키워 가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분노가 치민다. 저자는 한반도가 영원한 자기네들의 속국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를 소재로 '고구려를 위해서'를 집필하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하며 일생의 보람으로 여긴다.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빌어 본다. 1200년이 지나도록 이역의 산하를 헤매었을 고구려 유민들의 넋이며, 이정기 장군의 고혼이여, 이젠 민족의 가슴속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잠드소서. 1997년 태국 북부 황금의 삼각지대에서 저자 차례 아아! 펴라성 안시성 전투 기울어져 가는 고구려의 국운 압록강에서 펴라성까지 자존심을 건 무예 대결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 끌려가는 고구려 백성들 망국의 한을 품고 다시 못 올 1만리 강이 보인다 부활의 대화 파편의 기억을 찾아서 역사학적 고증 아아! 펴라성 고구려 보장왕 27년 9월 5일. 인시 무렵이었다. 아직 단잠을 깨기에는 이른 시각. 달디단 새벽잠에 빠져 있는 펴라성 내에 난데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불이야! 불이야!" 고함소리 사이로 때아닌 말발굽 소리가 펴라성 거리를 요란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도승 신성이 열어준 서문으로 당군의 특공기병대가 몰래 들어와 성벽 위에서 북을 치며 펴라성내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성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하늘로 뻗쳐오르는 검은 연기가 일시에 빨갛게 물들어 오는 새벽 노을을 가렸다. 자다가 놀란 백성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허겁지겁 기어 나와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잠깐, 펴라성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도승 신성 무리의 안내를 받은 당군의 특공대는 아주 민첩했다. 그들은 조를 나누어 일조는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가서는 간밤에 대취해 세상이 어떻게 변한 줄도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보장왕과 왕족을 모조리 사로잡아 버렸다. 또 다른 조는 막리지 남건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남건의 호위군사들은 몇 명되지 않았다. 벌써 당군의 입성 소식을 듣고서 제각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도망쳐 버린 뒤였다. 당군의 특공대는 대항하는 호위군을 간단히 처치하고는 남건의 침소로 곧바로 쳐들어갔다. 아뿔싸! 침소가 텅 비어 있다. "벌리 달아나진 못했을 게다. 어서 찾아라." 특공대는 혈안이 되어 저택 안팎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저택의 한 귀퉁이에 있는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웬 신음소리가 났다. 달려가 보니 누군가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있었다. 말리지 남건, 그도 부끄러움은 있었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배를 갈랐으나 상처가 깊지 못해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날 사시(오전 10시), 당군의 대총관 이세적은 본부군 20만을 이끌고 당당히 펴라성에 입성했다. 벌써 보장왕 이하 왕족과 문무군관들은 모두 당군에 붙들려 짐짝처럼 한곳에 갇힌 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조 추모왕때부터 대대로 동방 최고의 강자로 군림해 온 고구려의 천년 사직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엄청난 손실이었다. 이것은 분명 배달겨레인 한민족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좁은 반도 내에 움츠러들어, 영원히 힘없고 남의 압제나 받는 민족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펴라성을 점령한 당군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고구려의 관원과 백성들을 붙잡아들이는 일었다. 이무렵 고구려의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제형, 선인 등 모두 12등급. 이들은 속속 붙잡아 창고 속에 가두었다. 당군은 반항할 위험이 있는 고구려인이면 비록 관원이 아니더라도 이 잡듯 색출해서 가두었다. 또 펴라성은 물론 온 고구려의 민가를 뒤져 젊은 여자는 가리지 않고 잡아들였다. 열 살이 겨우 넘은 계집아이로부터 30이 넘어 벌써 딸린 자식이 대여섯 명이나 있는 유부녀까지도 모조리 끌어갔다. 당군은 처음부터 과거 천 년 동안 고구려에 눌려지낸 앙갚음으로 고구려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당군들에 의해 나이 어린 딸이 끌려가고, 10여 년 동안 자식을 낳고 함께 살아온 아내가 끌려가고,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나이 든 부모나 지아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창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들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구려의 전 국토는 금시 초토화 되고 통곡소리가 방방곡곡에 연일 그치지 않았다. 한편, 고구려 궁궐의 새 주인으로 들어앉은 당군은 다음날부터 예정된 순서를 밟아 나가듯 보장왕 이하 문무백관에 대한 전범 재판을 시작했다. 단상에는 당군 대총관 이세적과 부총관 학처준, 백안륙, 신라인 부장 김인문이 정좌했다. 이윽고 당하의 육중한 고리문이 열리며 무장들의 삼엄한 경비속에서 보장왕이 끌려와 단 아래에 무릎이 꿇려졌다. 궐 안에서만 지내서인지 얼굴색이 파리했고 눈빛은 이미 제왕으로서의 정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세적이 보장왕을 내려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경은 우리 당나라로부터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봉함을 받았건만 어찌하여 우리 당나라를 대적하고도 뉘우침이 없었소?" 보장왕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이세적은 다시 윽박질렀다. "더욱이 항복사절까지 보내 놓고도 싸움을 걸어온 잘못에 대해서는 이제 무어라 변명하겠소?" 오랏줄에 묶인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보장왕이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곤룡포자락은 너덜거리고, 머리는 풀어 헤쳐져 몰골이 한낱 평범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은 아직도 제왕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패군한 왕이 이제 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소." "그럼 경은 이제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이오?" 보장왕은 침묵했다. 그때 이세적의 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장내를 울렸다. "항복을 하겠느냔 말이오?" 보장왕의 입에서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분만 바라겠소." 그러나 이세적은 고구려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는 터였다. 보장왕은 실권도 없는 한낱 허수아비이고 고구려의 국사는 모두 연시 집정부에서 결정해서 집행했다는 사실이 참작되었던지 이세적의 처분은 관대했다. 한편으로는 보장왕이 다칠 경우 그로 인한 고구려 민중의 저항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리라는 정책적 계산도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경이 비록 죽을 죄를 지었다 하나 우리 천자께서는 인후 대덕하여 경을 용서하고 특별 대접을 하러 하오." "..." 보장왕은 결박에서 풀려나고 그날부터 별궁에서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은 당연히 막리지 남건의 차례였다. 상투를 풀어헤친 남건은 피범벅이 된 채 무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남건 역시 이세적이 앉아 있는 단 아래에 꿇어앉았다. 그도 시종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막리지 남건!" 이세적의 목소리는 보장왕을 심문할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위압적이었다. "그대는 불충하게도 위로는 임금을 위협해 정사를 마음대로하고 형제간에 불화로 인해 친형 남생을 죽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만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장본인인즉 그대가 저지른 죄가 만고에 큰 것임을 알겠소?" "면목이 없소." 남건의 목소리는 겨우 들릴 듯 말듯 기어들어 갔다. "면목이 없다! 그럼 면목을 아는 자가 어찌해서 천자에게 감히 대들었단 말이오?" 남건은 중국의 천자에게 대들었다는 말이 떨어지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이세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노려보았다. "천자는 당신들 중국인의 천자일 뿐이오. 나는 오직 우리 겨레를 위해서 싸웠소." 그때 단상에서 또 다른 호통소리가 벽력같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신라인 부장 김인문이 씩씩거리며 단 아래에 있는 남건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긴 턱수염을 덜덜 떨었다. "이놈아! 우리 겨레가 다 뭐냐? 당나라는 우리의 어버이 나라다. 천자를 모독한 너 같은 놈은 능지처참을 해도..." 이때 이세적은 손짓을 해 김인문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남건! 그대는 아직도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끝까지 당나라에 대적해 싸울 생각이오?" "그렇소.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아직도 그대가 뉘우침이 없다면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소." 이세적은 즉시 무사들에게 명해 남건을 중죄인으로서 당나라에 호송시키도록 했다. 그는 결박을 당한 채 끌려나갔다. 남건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지 않은 것은 그가 고구려를 지배한 실세였기 때문에 이세적으로서도 당고종의 허락 없이 그의 생살여탈을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더욱이 남건을 장안에 끌고 가서, 당나라에 대적하면 그 말로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어서 자소가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단 아래에 꿇어 앉혀졌다. 자소를 본 이세적의 입에서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가 자소 장군을 이리도 예의 없이 대접하였느냐? 당장 결박을 풀지 못할까!" 순간 자소를 호송해 온 무사들은 당혹감으로 움찔 놀랐다. "냉큼 포박을 풀고 단 위로 모셔라." 그러나 자소는 그 자리에 붙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소는 이세적의 뜻밖의 대접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이세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세적 장군! 호의는 고맙소. 하지만 이 몸은 패군지장, 이 정도의 대접도 과분할 따름이오." "자소 장군! 경황중에 내가 너무 무례했음을 용서해 주시오." "아니오. 나도 일생 동안 무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소. 이세적 장군의 과분한 대접은 진실로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당장 이세적은 자소의 꿋꿋한 기상에 감동했던지 말소리가 한층 부드러웠다. "천자께서도 자소 장군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분부가 있었소. 이제 나와 함께 더넓은 천지로 나아가 세상 천하를 위해 일해 볼 생각은 없소?" "고마운 말씀. 그러나 이세적 장군이 가는 길이 있듯이 이 몸도 가야할 길이 따로 있소. 진정으로 장군이 이 몸을 생각해 준다면 무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마지막 길을 택하게 해주시오." 곧 죽이거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뜻이었다. 자소는 자신이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인생을 떳떳하게 마감하고, 고구려 민중들의 애국심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세적 역시 자소의 무용과 인품을 익히 아는 터라 더 이상 붙들고 회유할 말이 없었다. 그는 혼자서 장탄식을 했다. '내 나이 이제 팔십. 그간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저렇듯 훌륭한 장수는 만나본 일이 없다. 못난 왕과 미련한 남건이 천하에 으뜸가는 장수를 저지경으로 만들었구나.' 그때까지 이세적의 서슬에 눌려 감히 입을 떼지 못하고 속으로만 분을 삭이고 있던 당군 장수 몇 사람이 들고 일어났다. "대총관 각하, 자소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다음 장수가 또 나섰다. "선대 때부터 저 자소 때문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우리 병사 100만 명의 해골이 지금도 요동벌에서 원혼이 되어 헤매고 있습니다." "선제 태종께서도 자소의 화살에 맞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붕어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번 싸움에서도 욕이성으로부터 펴라성에 이르기까지 40만이 넘은 우리 군사가 자소 때문에 죽었습니다." "자소는 죽여야 합니다. 죽여서 우리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 주십시오."단상과 단하에 도열해 있는 여러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소를 죽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오자 이세적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세적도 당대의 명장. 비록 싸움터에서는 생사를 놓고 겨루었을망정 자소와는 서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세적은 궁여지책으로 김인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자소와 동족이니 동정적인 대답이 나오면 그것을 빌미로 자소의 목숨을 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인문의 입에서는 더욱 가혹한 말이 새어 나왔다. "당연히 죽여야 합니다. 모처럼 사로잡은 호랑이를 다시 풀어 주면 훗날 반드시 해를 입힐 것입니다." 신라 장수 김인문은 말을 마치고는 경멸하는 시선으로 자소의 초라한 몰골을 훑었다. 이세적은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부수를 불러 자소를 끌고 나가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목을 칠 때 예의를 잊지 말고 정중히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이것만이 이세적이 자소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마지막 대접이었다. 이윽고 무사들이 자소를 일으켜 세웠다. 자소는 이세적에게 온화한 시선을 보내어 예의를 차렸다. 그리고 죽음을 맞으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소가 무사들에게 끌려 마악 고리문을 열고 형장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잠깐!" 단상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대총관 각하! 자소에 대해서는 천자께서도 따로 어명을 내렸으니 여기서 함부로 처결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쳐다보니 그 사람은 다름아닌 요동도 행군부대총관겸 안무대사 설인귀였다. "아! 경황 중에 하마터면 천자의 어명을 어길 뻔했구나 ..." 설인귀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 이세적은 급히 무사들을 불러들여 자소의 사형 집행을 중시시키고 중죄인으로 함거에 실어 장안까지 호성할 것을 명했다. 을불수, 온상덕, 대청군, 고문간 등 당군에게 치명타를 입힌 장수들도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추호도 굽힘이 없었다. 결국 그들도 자소와 같은 중죄인이 되어 당나라로 호송하기로 판결이 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당군에 대적해서 용감하게 싸웠던 대중상과 대조영의 모습이 종내 보이지 않았다. 먼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자소가 펴라성 수비군 대장에서 면직되던 바로 그날 밤 대중상은 아들 대조영을 데리고 성벽을 타넘어 압록수 쪽으로 몸을 피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정복자가 된 당군의 심판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관대했다. 승자의 아량이었다기보다는 900년 동안을 동방의 강자로 군림해 온 고구려 민중을 자극하는 것이 점령지를 통치하는 데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다분히 정책적인 복선이 깔려 있었다. 다음은 연씨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연개수오, 고산수, 고혜상의 차례였다. 그들은 오랏줄에 줄줄이 묶여 재판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어허! 그대들 같은 귀빈을 이렇게 무례하게 모셔 미안하오." 짐짓 비아냥거리는 이세적의 말에 이들은 송구스러운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대총관 각하! 저희 같은 중죄인에게 감격의 말씀을 내려 주시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눈치가 빠른 고례상의 대답이었다. 뒤이어 고혜상의 말에 질세라 연개수오가 읊조렸다. "요동도행군대총관겸 안무대사 각하의 얼굴을 뵈오니 변방의 미개한 나라에 광명 천지가 도래하는 듯합니다." 이세적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눌러 참고 다시 한 번 이죽거렸다. "천만의 말씀을 ... 만약 그대들의 공이 없었으면 어찌 우리 당나라가 쉽게 펴라성에 입성할 수 있었겠소?" 이세적의 말은 세 사람의 간신배가 고구려를 썩게 했기 때문에 당나라가 쉽게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제서야 이세적의 비아낭거림을 눈치 챈 세 사람은 숙였던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고산수의 애걸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만하게 들려왔다. "대총관 각하! 이 몸은 천번 만번 죽어 마땅할 중죄인이오나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신명을 바쳐 당나라를 섬기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를 따르겠느냐?" "물론입니다. 이제 고구려는 이 세상에 다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이제부터 신명을 바쳐 죽는 날까지 당나라를 섬기겠습니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이쯤해서 세 명의 장수들이 용서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세적의 입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들! 아직도 주둥아리는 살아 있었구나." "..." 고혜상, 연개수오, 고산수는 순간 얼이 빠진 듯한 시선으로 이세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세적의 다음 명령은 냉혹했다. "냉큼 저놈들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 "저놈들은 제 나라를 망하게 한 놈들이다. 만일 살려 두었다가는 우리 당나라도 망하게 할 것이다." 고혜상 등은 도부수에 이끌려 나가 목이 베어졌다. 펴라성을 점령한 당군이 고구려군 장수를 사형에 처한 유일한 경우였다. 다음은 펴라성 함락에 결정적으로 공헌을 한, 대로 예불여상, 고사지, 도승 신서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측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이었지만 당나라로서는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한 일등 공신들. 이세적은 온화한 목소리로 거듭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내 어찌 이토록 큰 공을 세웠으리오." "너무나 황공한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예불여상이 이세적의 말에 감동되어 머리를 다시 한 번 조아렸다. "아니오. 엄동살한에 군량도 떨어지고 진정 고립무원이었소. 아마 십중팔구는 우리 당군이 다시 한 번 저 살수나 안시성 때의 악몽을 되밟았을 순간에 그대들이 우리를 구원해 주었소." "소인들의 조그만 공을 과찬해 주시니 감히 몸둘 바를 ... " 예불여상과 신성은 말로 겸손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앞으로 다가올 부귀영화의 꿈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이세적의 판결도 이들이 바라는 바에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장안으로 갑시다. 내 천자께 상주해서 그대들에게 후한 작록을 내리게 하리라." 예불여상, 고사지, 신성은 이세적을 향해 거듭 감사를 했다. "당나라에 가서도 목숨을 다해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뒤이어 열린 대대로 남산에 대한 재판도 남산의 끝까지 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예불여상과 신성의 반열에 끼워 대접하기로 했다. 별궁에서 재판에 대해 전해 들은 보장왕은 그래도 일말의 감회는 있었던지 애매모호한 말을 중얼거렸다. "때가 되니 세상이 변하는구나." 그런데 옥에 갇혀 있는 남건은 조금 달랐다. "내 어리석음으로 나라가 망하다니 ... 아! 천추의 한이로다." 그때서야 남건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지난날들을 곰곰이 되씹어 보니 형 남생을 죽이려 한 일로부터 자소를 펴라성 수비대장직에서 내쫓은 일까지 하나같이 어리석은 일만 저질렀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잘못을 뉘우치며 가슴팍을 쥐어박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자소의 심중은 한층 착잡했다. 옥에 갇힌 자소는 매일 눈을 감고 민족의 역사 앞에 중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어느덧 그의 입에서는 탄식의 소리가 목구멍을 뜨겁게 넘어왔다. "아, 이제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자소는 문득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속으로 부르짖었다. '가므여(하느님)! 가므여!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었나이까?' 생각해 보면 고구려는 다른 민족에게 쉽사리 정복당할 약한 민족이 아니었다. 3천여 년 전, 고구려의 조상들은 멀리 먼 소아시아의 흑해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수십만 리의 길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더듬어온 강인한 민족이었다. 당시의 흑해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기름져 지구상에서도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지역의 하나였다. 그런데도 고구려 민족은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굳은 신앙 때문에, 하느님이 계시리라고 생각되는 밝은 동녘땅을 향해 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가며 이 한반도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은 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허허로운 사막지대를 지났다. 인도 대륙에 들어서서는 히말라야 산맥 바로 아래서 몇 세대를 보냈다. 그리고 난 다음 뱅콕 평원에 이르러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만 고구려 민족 특유의 하느님 신앙 때문에 또다시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바닷길을 건너 드디어 한반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발걸음은 다시 북으로 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북쪽으로 간 조상들은 드디어 대륙의 벌판에 부여와 고구려를 세우고 남쪽에 머물렀던 부족들은 마한, 변한, 진한을 세우고 또 동쪽 바다를 건너간 부족은 일본을 세웠다. 고구려 민족이 나라를 세울 무렵에도 서쪽에는 한족이, 그리고 북쪽에는 알타이어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민족은 이들보다 월등히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후 이민족인 중국의 한족에게 백제가 망하더니 뒤이어 고구려가 망해 드디어 한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질 위기에 처해 버린 것이다. 같은 옥에 갇혀 있는 을불수와 고문간도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탄에 잠겨 매일같이 자소를 졸라댔다. "자소 대형, 되놈들에게 이처럼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시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고구려의 민족혼을 보여 주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러나 침묵만 지키고 있던 자소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소 대형, 왜 이제 와서 죽음을 망설이는 것이오?" 드디어 자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죽는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오. 살벌한 전쟁터에서 벌써 여러 번 죽은 목숨이오." "그러면 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입니까?" 마침 그때 펴라성의 조무래기 아이들 몇 명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줄 알고 몰려와 옥문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당군 수비병들이 쫓아내는 데도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옥문의 창살 틈으로 갇혀 있는 죄수들을 들여다보았다. 차츰 그들도 마음속에 어렴풋이 와 닿는 것이 있는 듯,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 속에 어렸던 호기심이 어느덧 연민의 눈길로 바뀌어 갔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어느날 자기들이 감옥 창살 틈으로 목격한 광경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으리라. "바로 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시오. 고구려는 우리들만으로 끝나지 않았소. 우리들이 설사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한 다 할지라도 저 아이들만은 보호해야 하오." "그럼 저 아이들이..." "그렇소. 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민족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구려는 결코 멸망할 수 없소." "그러면 정녕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자소도 앞일이 암담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 백성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남아야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오." "음-." 자소의 말을 듣고 난 을불수와 고문간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한숨소리는 고구려 방방곡곡에서 들려 왔다. 집을 떠난 지 오래인지라 성에 굶주린 당군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민가는 휩쓸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자를 붙잡아 옷을 갈기갈기 찢어 알몸을 만들고는 열 놈, 스무 놈이 차례로 달려들어 욕보였다. "아이고 어머니! 날 살려 -." 나이 어린 딸이 애절한 비명소리를 듣고도 부모는 실성한 사람처럼 멀거니 지켜봐야만 했다. 가족이나 동네 이웃들이 이리 떼와 같은 당군을 가로막아 서면 당군은 부모는 물론 어린 자식들까지 참혹하게 죽여 버렸다. 당군들의 소행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자들을 산속에다 숨겼다. 그러나 이 낌새를 알아챈 당군들은 마을에 들이 닥쳐 여자를 내놓으라고 닦달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동네 사람 몇 명을 본보기로 잔인하게 죽여 기필코 욕구를 채우곤 했다. 또 때가 눈발이 날리는 겨울철인지라 살이 저리도록 추운 산 속에서 여자의 몸으로 오랫동안 숨어 지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당군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밤낮으로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젊은 여자다 싶으면 우르르 떼ㅐ로 몰려 잔혹하게 윤간을 하는 게 예사였고, 욕심을 채우고 나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여자들을 짐짝처럼 달구지에 실어 펴라성으로 보내 버리기 때문이었다. 펴라성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옥에 갇혀 있는 자소의 세 딸 나영, 나선, 나라까지도 모두 겁탈을 당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펴라성이 당군에게 점령되고 이틀이 지난 밤중, 자소의 두 아내 초혜와 나싸는 붙들려간 자소가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자정쯤 되어 갑자기 골목 안이 왁자지껄 소란스럽더니 당군 역댓 놈이 느닷없이 달을 넘어 들어왔다. 그들은 초혜와 나싸를 기둥에 꽁꽁 붙들어 매놓고는 이제 열 아홉 살인 나영, 열 여섯 살인 나선 그리고 겨우 열 다섯이 된 나라를 덮친 것이다. 여린 딸들이 고통을 못 이겨 "악" 하고 숨이 끊어지도록 내지르는 비명소리에 충격을 받은 자소의 두 아내도 그만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악몽과도 같은 그날 밤이 샐 무렵 초혜와 나싸는 또 한 번 혼절하고 말았다.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는 새벽 빛에 누군가 서까래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큰딸 나영이 목을 맨 것이었다. 나영은 몇 해 전 설날 지신을 밟다가 우연히 만난 대중상의 둘째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정조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 악몽은 그날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그 처참한 꼴을 당한 나선과 나라는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들도 제각기 부모가 짝지어준 신랑감이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과정을 겪고 고구려 전국에서 펴라성으로 붙들려온 고구려 여자들이 3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일찍이 고국원왕 12년(342), 연왕 모영황에게 당신의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남녀 5만여 명이 붙잡혀간 이래로 가장 큰 민족의 수난이었다. 한편 펴라성과 고구려의 전 국토를 점령한 당군은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당나라로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펴라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우위대장군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해 군사 2만 명으로 고구려 땅을 지배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엄청난 수의 고구려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갈 준비를 서두르고 이었다. 이 와중에서 자소는 전범 재판 이후 옥에 갇힌 몸이 되어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날 며칠인가 낮과 밤이 바뀌고,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자소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왜 고구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는 침묵 속에서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시성 전투 자소는 본부인 초혜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셋, 그리고 형수였던 나싸에게서는 아들만 하나를 두고 있었다. 이제 초혜에게서 난 큰아들 자수는 스물이 되고 그 밑으로 아들과 딸들이 고만고만 열 일곱 여덟 살씩 되어 제법 어른티가 났다. 자소는 안시성 전투에서 함께 싸운 자막이 전사하자 홀로 된 형수 나싸를 당연히 아내로 맞이했던 것이다. 서기 645년, 그러니까 고구려가 망하기 24년 전. 영류왕이 죽고 보장왕이 보위에 오른 지 3년째가 되는 그해 이월, 정월이 지났건만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눈발이 날리지 않는데도 북국에서 불어오는 매운 바람에 대지가 꽁꽁 얼어 붙어 드넓은 요동벌에는 아직도 봄의 숨결을 찾기 어려웠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병을 일으킨다는 첩보가 있어 서둘러 요동 지역에 응용군을 파견했다. 주느부에서 대형 을소가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으로, 그리고 대형 자막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 자소와 함께 안시성으로 출전을 해서 성주 양만춘 장군 휘하에 배속되었다. 그해 3월, 예상대로 당태종은 친히 100만 명이라는 역사상 미증유의 대병을 이끌고 요동 지역을 무인지경으로 덮쳐 왔다. 당군은 2개 방면으로 쳐들어왔는데 제1군은 장량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수군으로 황해 바다를 건너와 직접 펴라성을 공격하도록 했고, 제2군은 이세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요동을 거쳐 펴라성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군신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요동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다. 전조 수나라가 네 번을 고구려와 싸웠으나 빈번이 패하여 수많은 백성들만 죽고 나라가 망해 버렸다. 나는 이제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여 우리 중국 사람들의 철천지원수를 갚겠다." 당태종은 친히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중국 역사상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대군을 이끌고 요택(황하 왼쪽 지류에 있는 진흙탕길) 200여 리를 넘었다. 고구려와 국경인 요수에 이르러 부교를 설치해 군사들을 건너게 한 다음 부교를 아예 끊어 버렸다. 당태종은 퇴로를 차단하고 배수의 진을 쳐 기필코 고구려를 쳐부수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 있었던 것이다. 당군이 고구려의 국경을 넘자, 그 후 안시성에 시시각각 들려 오는 소식은 모두 급박한 내용들뿐이었다. 같은 해 4원, 당나라 장수 이세적의 군사가 현도에 이르고, 부대총관 강하왕 이도종의 수천 군사는 신성을 포위 공격중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신성을 공격하던 이도종 휘하의 도위 마문거와 행군총관 장군차는 첫싸 움에서 고구려군에게 대참패를 당했다. 당태종은 천성이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머리를 풀고 계하에 엎드려 석고대죄하는 장군차를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본 다음 제장들을 돌아다보았다.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지 못할까!" 제장들은 몸을 떨었다. 자기들도 언제 패전을 해 저지경이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그래도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세적의 입에서 떨려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뒤이어 터진 당태종의 추상 같은 호령소리가 삼켜 버렸다. "저놈은 당군의 예기를 꺾어 놓았으니 용서할 수 없다." 살이 올라 아랫볼이 처진 당태종은 침을 탁 뱉고는 탐욕스런 뱁새 눈초리로 제장들을 다시 한 번 노려보았다. 겁에 질려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장군차를 죽인 당태종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끈질긴 공격을 퍼부었다. 당군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처음부터 인해전술로 나왔다. 신성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신성을 무너뜨려 사기가 오른 당군은 고구려의 성들을 파죽지세로 엎쳤다. 곧이어 요동 지역의 최전방에 있는 건안성이 당나라 영주도독 장검이 거느린 호병에게 유린당해 고구려 군사 수천 명이 죽었고, 개모성마저도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견디지 못하고 함락당해 1만여 명이나 되는 우리측 군사들이 포로가 되고 군량 10만 석을 빼앗겼다. 한편 요동 지역의 배후를 차단할 목적으로 진출시킨 장량의 해군은 압록강 어귀의 비사성을 공격, 성안에 있던 고구려 백성 8천여 명이 이리 같은 당나라 병사들의 창칼에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해 5월이 가기도 전에 요동 일대의 크고 작은 성들이 차례로 당나라 병사들의 사나운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그때까지 살아 남아 버티고 있는 고구려의 큰 성은 요동, 백암, 안시성, 그러나 이들 세 성마저도 당나라 해군에 의해 비사성이 떨어지자 본국과 연결이 끊겨 절해고도와 같이 고립무원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전황이 이지경이 되고 보니 900년 사직 고구려의 운명이 일시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그때쯤 안시성주 양만춘은 속속 날아드는 비보에 장탄식을 하며, 그의 대춧빛 얼굴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허! 조정이 그 꼴이니 나라가 망하는구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하고 있는 연개소문과 그로 인해 허수아비가 되어 있는 보장왕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양 장군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곁에 있던 주느부 대형 자막은 젊은 혈기로 호기가 만만했다. 그의 두 눈에 아연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33년 전 영양왕 때 신장 을지문덕은 113만 명이나 되는 수나라 군사를 일격에 무찔러 해를 흐리게 하고 중원을 망하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양만춘 장군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양만춘 장군은 대답을 짧게 끊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을지문덕 장군 밑에서 싸웠던 자신의 젊은날을 더듬으며 새삼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도 살수전 때 을지문덕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을 했던 것이다. 그사이에도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개모성을 요절낸 당군은 50만의 병력으로 응원군까지 합쳐 겨우 4만이 대항하는 요동성으로 달려들었다. 당군의 끈질긴 공격에도 요동성은 12일 동안이나 잘 버텨냈지만 성안에 불길이 치솟는 바람에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냇물을 이루었다. 펴라성 주느부에서 구원하러 간 대형 을소는 이때 죽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시성과 지척간에 있어 싸움이 있을 때마다 서로 협공하여 적을 물리쳤던 백암성에 있었다. 연개소문의 친인척으로 평소에도 겁이 많아 성주로서 자질이 없던 자인데 요동성이 함락되어 피로 물들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대음은 심복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그날 밤 몰래 성을 빠져나가는 자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 성내 이곳 저곳에 당나라 깃발이 꽂혀 있고 서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본 당태종의 탐욕스런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흘렸다. "오호라, 이제야말로 안시성은 내것이로구나!" 당태종은 백암성만 탈취하면 절름발이 신세인 안시성을 일격에 무찔러 전대 수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원래 안시성의 관할 내에는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진영이 있었는데 이중 건안과 백암 두 진영마저 벌써 당군에게 짓밟힌 상태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안시성에 이르자 잔뜩 거드름을 부린 편지를 보냈다. 안시성주 양만춘 보아라. 나는 이미 사해를 평정하고, 이제 너희 어리석은 무리를 정벌하러 몸소 여기까지 왔노라. 이미 개모, 건안, 요동, 백암성과 고연수 무리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지어다. 나는 단 일격에 이들 성과 고구려 대군을 초토화시켰노라. 안시가 크다 한들 요동, 개모성의 한쪽 귀퉁이보다 못하지 않느냐. 어서 내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을 쳐 빼앗는 날 성안에서 소리 내는 것, 살아서 움직이는 것 모두를 죽이리라. 대당 황제 양만춘 장군 이하 여러 장수들은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당태종의 편지를 보고는 치를 떨었다. 그 자리에는 안시성을 도우러 온 주느부의 대형 자막과 그의 동생 소형 자소도 있었다. 당태종의 준 모욕감으로 눈에 핏발이 선 장수들은 편지를 가지고 온 당태종의 사자를 당장 목베어 그 머리를 성밖으로 던져버리자고 했으나 양만춘 장군은 이를 말렸다. 결국 사자를 발가벗긴 후 여자 옷을 입혀 되돌려보내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했다. 그런데 문제는 성안의 백성들이었다. 개모와 요동성에서 우리 백성 10만 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기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를 성채로 올라가 성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는 당군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안의 백성들이었다. "형을 죽인 패륜아, 당태종 이세민아." "아버지를 쫓아낸 불한당아!" "오랑캐야! 살인마야!" "네 사지를 찢어 요동의 백골로 만들어 주마." 이 소리를 들은 당태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분기를 참지 못해 처진 볼을 씰룩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성을 쳐 깨뜨리는 날, 저 악독한 놈들을 남김없이 죽여라! 갈가리 찢어 죽여라!"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당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공격의 선두에는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친다는 만부부당의 설인귀, 장량, 이세적, 이도종, 와예, 부복애 등이 각각 10여만 명 씩의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성의 사면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주느부의 대형 자막과 소형 자소는 안시성의 동남쪽을 맡고 있었다. 이윽고 두 형제는 보았다. 맑던 하늘에 갑자기 메뚜기 떼처럼 달려드는 물체들을, 그리고 대숲 같은 깃발과 자욱한 먼지가 해를 가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 오는 것을. 안시의 동남쪽을 공격해 오는 당군의 장수는 바로 용맹스럽기가 범 같다는 이도종. 그는 일찍이 고창국과의 싸움에서 단기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 고창국왕을 사로잡았으며, 또 선우와의 싸움에서는 하루에 적장 열 둘을 목베어 그 머리를 마상에 매달고 다녔다는 이름난 장수다. 보름 전 요동성 싸움에서도 좀처럼 성이 떨어지지 않으니까 혼자서 외줄을 타고 성 꼭대기로 기어올라가 대항하는 고구려 군사들을 단검으로 무수히 살상한 후 성채에 불을 놓아 요동성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이었다. 바로 이도종이 나서서 싸움을 돋우는 안시의 동남쪽은 어느 곳보다 전투가 치열했다. "와! 와!" 당나라 군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긴 갈고리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우리측 군사들은 사다리를 붙잡아 쓰러뜨리고, 화살로 쏘아 죽이고, 그래도 성벽 위로 끝까지 기어오르는 놈은 창이나 칼로 후려쳐 성 밑으로 떨어뜨렸다. 성 내에 있는 백성들은 끓는 물을 퍼 들고 나와,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놈의 머리를 향해 쏟아 붓기도 하고 돌멩이를 던져 머리통을 까부수기도 했다. 안시 전투는 군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성내에 있던 남녀노소 2만 여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웠다. 그러나 문제는 당나라 군사가 100만 명인 반면 안시성의 병사가 겨우 1만 여 명에 지나지 않아 당군이 처음부터 수적 우세를 믿고 인해전술로 나오는 데 있었다. 개미떼들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을 죽을 힘을 다해 물리치면 성 밑에 무수한 시체들이 쌓였다. 그러나 곧이어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부대가 다시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파상 공격이 꼬박 8일 동안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버티고 있는 안시성의 군민들도 대부분 탈진해 이러한 상태가 하루 이틀만 더 계속된다면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이세민은 연일 싸움에 지친 제장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할 수 없다. 바로 그때가 이른 것 같다." "그때라뇨?" 장수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당태종은 새로운 작전 지시를 내렸다. "내일은 준비해 온 새 병법을 쓴다." 전쟁의 마지막 국면에 이르면, 펴라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려고 아껴 두었던 비밀 병기를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온종일 당군이 공격해 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성위에서 안시성 병사들이 바라다보니 당군은 성으로부터 천 여 보 물러난 지점에서 자기들끼리 지껄여 대며 물건을 운반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망치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튼 이날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기진맥진해 있는 심신을 잠시나마 쉴 수 있었지만 주위의 공기는 여전히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군 진영에서 밤새도록 뚝딱거리는 소리와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다음날 미명에 성벽 위에 있던 안시성 군사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게 뭘까?' 바로 그들의 코앞에 시커멓고 괴상하게 생긴 물건이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운제라는 공성 무기. 네 개의 큰 바퀴 위에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붙여 놓고 사다리 꼭대기에 나무 판대기로 큰 방을 만들어 당병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성을 넘겨다보며 편리하게 싸울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고구려 병사들이 생전 처음 보는 장비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 날이 밝아 오자 갑자기 운제 속의 당병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무수히 화살을 쏘아 댔다. 쉭 쉭. 성책 위에서 싸우는 고구려 군사들이 화살에 맞아 계속 쓰러져 갔다. 반면에 고구려 군사들이 기를 쓰고 화살을 쏘아보아야 운제 벽에 맞고 땅에 떨어질 뿐이었다. 속수무책인 고구려 군은 당황했다. 그사이에도 이곳 저곳에서 화살이 맞고 쓰러지는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만이 처참하게 들려 왔다. "어이쿠!" "저런 어쩌나." 전황이 일시에 바뀌자 이젠 갈고리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개미떼들처럼 기어오르는 당군을 저지할 도리가 없어진 것이 더 큰일이었다. 그래도 고구려 병사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힘을 다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다. 그러다가 운제에서 비오듯이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으면 또 다음 사람이 성 위에 올라가 기어오르는 당병을 막았다. 이렇게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고 있을 즈음 또다시 괴변이 일어났다. 당군 진영에서 바퀴가 달린 큰 수레에 두 아름도 넘는 통나무를 잡아 맨 충차가 굴러오는 것이었다. 쾅! 뒤이어 통나무 끝이 성벽에 부딪쳤다. 순간 성벽이 움찔 흔들렸다. 충차를 밀고 온 당군들은 충차를 뒤로 끌더니 또다시 성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밀어붙였다. 쾅! 도로 쌓은 성벽에 금이 갔다. 안시성의 절대절명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때 아수라장이 된 성책 위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소! 자소!" "예, 대형." "너는 여기를 지켜라. 한 사람이라도 물러서면 마지막이다." 그리고 충차가 성벽을 깨고 있는 지점으로 달려가는 형 자막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소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느덧 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안시성도 이제 끝이 오는가?" 그때 와하! 하는 함성소리에 눈을 떴다. 바로 전에 자막이 뛰어간 성채 문루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충차를 향해 떨어지고, 충차를 끌던 당병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는 것이 보이더니 이윽고 충차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멈춰 섰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형 자막이 성을 구해낸 것이다. 충차가 서너 번만 더 성벽에 부딪쳐 왔어도 성은 아마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그 무너진 구멍으로 당병이 물밀듯이 성안으로 짓쳐 들어왔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소가 맡고 있는 쪽의 공격은 그 위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운제에서 쏘는 화살에 맞아 죽으면 또 다른 병사가 올라가 그 자리를 메우기를 한식경이나 되풀이하다 보니 이쪽의 사상자도 자그마치 500여 명이나 되었다. 자소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하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병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쉿 - 소리와 동시에 자소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화끈한 불이 스치고 지나갔다. 운제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은 것이다. 자소는 어른 화살을 뽑고 외쪽 어깻죽지를 감싸 쥐었다. 금세 붉은 피가 흘러내려 전포를 적셨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기에는 전황이 너무나 다급했다. 운제를 때려부수지 못하는 한 이쪽의 사상자는 계속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시성도 드디어 마지막이라는 절망감이 들었다. 운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쪽의 성책을 운제보다 더 높게 쌓고 맞서 싸워야 하는데 전세가 급박하다보니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였다. 자소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렇다면?' 자소는 병사를 시켜 급히 솜과 기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솜뭉치에 기름을 적신 다음 화살 끝에 꽂고 불을 붙여 운제를 향해 쏘도록 명령했다. "쏘아라! 쏘아라!" 자소는 미친 듯이 외쳐 댔다. 삽시간에 불화살이 날아가 운제에 꽂혔다. 병사들은 운제를 향해 불화살을 쏘고 또 쏘았다. 이윽고 운제에서 검은 연기가 솟기 시작하자 운제 속에 있던 당군들이 연기와 불길을 피해 땅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와! 만세." 우리쪽 병사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들렸을 때는 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던 스무대 가량의 운제가 따면서 뿜어 내는 검은 연기들이 성책을 뒤덮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당태종은 처진 볼을 씰룩거렸다. "듣던 대로 안시성 놈들은 독종이구나." 그날 당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래서 한 시각이 십 년처럼 느껴지던 하루가 지나갔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처음 당군이 안시성을 에워 ㅆ을 때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식으로 안시의 군민들을 오로지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다. 그러나 당군이 포차로 돌을 날려 성안의 이곳 저곳이 부숴지고, 운제와 충차의 공격으로 낙성의 위기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왔을 때는 모두들 절망감으로 허둥대기만 했다. 그런데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운제와 충차를 박살낸 후, 안시성 내 군인과 백성들의 사기는 다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앞으로는 무엇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반면 당군 진영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떡한다?' 당태종은 안절부절 못했다. 명색이 중국의 황제가 친전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요동성의 절반도 안 되는 안시성을 한 달이 다 되도록 갖은 묘책을 다 짜내어 공략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으니 그가 당황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나라의 서울 장안을 떠나 오기 전에 마련한 전투 계획에 의하면 이때쯤은 벌써 펴라성에 입성하여 승전 잔치를 벌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조그만 안시성에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 하자 당태종은 앞으로의 일이 난감하기만 했다. 첫째는 군량이 문제가 되었다. 하루에 병사 1인당 3홉씩 배급되던 것이 이젠 1홉으로 줄어들자 배고픈 병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다음은 추위였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철이 바뀌어 북쪽으로부터 허허벌판을 덮쳐올 눈보라를 감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 달 가까이 공성하는 동안 생긴 사상자만도 5만 여 명. 이래서는 당초 계획했던 펴라성 공격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당시에 전 동양을 지배하고 호령한다고 생각했던 중국의 천자가 100만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변방의 조그마한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천추의 역사에 남을 굴욕이요 치욕이었다. 그러나 당태종 역시 당대의 호걸다운 면모가 있었다. 그의 생각도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그에게 최소한의 체면만 선다면, 곧 안시성만 함락시킨다면 그것으로 제왕인 자기의 위신을 세우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의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초조하게 급해졌다. 이 낌새를 알아챈 외척 장손무기가 당태종에게 간했다. "안시성을 깨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왜 고민만 하십니까?" 당태종은 운제와 충차 등 신무기를 사용했지만 실패를 본 뒤라 표정이 시무룩했다. "거 있지 않습니까.." 장손무기는 당태종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그제서야 당태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 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즉 못했던고." 당군은 다음날부터 아예 원시 전법으로 나왔다. 즉 토산을 쌓고 땅굴을 뚫는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고구려 병사들은 당군이 밤낮없이 토산을 쌓는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강궁을 써서 화살을 날려 보아도 토산을 쌓고 있는 당군들에게는 미치지도 못했다. 싸움은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자막에게는 뜻밖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안시성의 동남쪽 전투를 지휘하며 낙성의 일보 직전에서 성을 구한 동생 자소의 병세가 날로 깊어 가고 있었다. 화살촉은 뽑아 냈지만 그사이 독이 퍼져 온몸이 푸르뎅뎅하게 변하고 화농으로 생긴 고열로 밤낮없이 신음하고 있었다. 성안에서 용하다는 의원들의 말로는 사막에서 사는 전갈독이라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성주 양만춘 장군도 전세가 급박한 상황에서 유능한 장수인 자소의 병세가 당연히 걱정되었다. "자소는 좀 어떤가?" 자막의 얼굴도 양만춘 장군만큼이나 어두웠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침묵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양만춘 장군과 자막이 돌아다보니 안시성 종사관 을지모수였다. "왜 학봉 처사를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학봉 처사?" 자막의 귀가 번쩍 뜨여 양만춘 장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신선이 되신 분을 어떻게 지상 세계로 불러 내린단 말이오." 양만춘 장군의 탄식에 모두들 침묵했다. 옛적 화타에나 견줄 만한 명의인 학봉 처사가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은 이러했다. 안시성 동북쪽 70여 리 떨어진 곳에 금미달이란 산이 있었다. 산자락을 돌아서 잣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갑자기 펑퍼짐한 분지가 나오고 기화요초가 만발해 속세를 벗어난 별천지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 조그만 초당 두어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언제부턴가 용한 의원 부부가 노모와 동자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이 의원의 의술은 신기를 가지고 있어 세상에 못 고치는 병이 없었지만, 노모가 덜컥 자리에 눕자 난감했다. 하필이면 곰 쓸개를 먹어야 만이 회복될 수 있는 병에 걸렸던 것이다. 의원은 생각하다 못 해 둔갑술을 이용하기로 했다. 가족이 잠든 한밤중이면 둔갑술 책을 꺼내 주문을 외고는 큰 호랑이로 변해 산속으로 들어가 곰을 잡아오곤 했다. 곰 쓸개를 먹은 노모의 병세가 차츰 호전되어 가던 무렵, 의원의 아내는 한밤중이면 홀연 자취를 감추는 남편을 수상쩍게 여기고 그 까닭을 캐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밤이 삼경에 이르자 의원인 남편이 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더니 가족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토방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지붕 위를 뒤져 책을 꺼낸 남편은 한참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남편은 곧 사나운 호랑이로 변해 산 속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이 광경을 보고 까무라치게 놀란 의원의 아내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붕 위에 감춰 놓은 둔갑술 책을 꺼내 불살라 버렸다. 곱을 잡아 가지고 새벽녘에 돌아온 의원은 다시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해 둔갑술 책을 찾았으나 이미 재가되고 난 다음이었다. 끝내 사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한나절이나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구슬프게 포효를 하다가는 마침내 산속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때 의원의 시중을 들던 동자가 바로 학봉 처사였다. 졸지에 스승을 잃은 학봉 처사는 스승이 쓴 책을 공부를 해서 비법을 전수받고 당대에 제일가는 의원이 되었다. 세상에 학봉처사가 못 고치는 병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스승의 내림이었던지, 의원이라기보다는 탈속한 도사다운 풍모가 있었다. 그래서 한번 집을 나가면 이삼 년 동안 종적이 묘연했다. 사람들은 학봉 처사가 금강산에 가서 신선들과 노닌다고 하고, 하늘을 오르내리며 두 세상을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학봉 처사의 인생에도 마지막이 있었다. 나이가 얼마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허연 수염을 한 학봉 처사가 어느 날 시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선계로 올라간다. 누구든 이 집 문을 여는 자는 천벌이 내릴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무도 그 집에 가서 문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집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어 폐가가 되고, 밤이면 흰옷을 입은 학봉 처사가 지붕 위를 걸어다닌다는 해괴한 소문만 나돌았다. "제가 학봉 처사의 집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을지모수에게서 학봉 처사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자막은 분연히 일어섰다. "아니?" 양만춘 장군도 기가 막히는지 자막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십 년도 넘은 옛 일입니다." 을지모수가 양만춘 장군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그러나 자막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동생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자막은 그 길로 폐가를 찾아 나섰다. 과연, 인적이 끊긴 지 오래 되었는지 청태가 낀 기와지붕 위에는 자초가 무성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설주 위에서 먼지가 후르르 떨어져 내렸다. 자막은 다시 중문으로 들어가 안채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참으로 오랜만에 문이 열렸다. 햇빛이 일시에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앗!" 자막은 기겁하여 뒷걸음질치다가 문지방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방 아랫목에 마치 미이라처럼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니, 허연 수염을 한 백발 노인은 학봉 처사임이 분명했다.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리 놀라느냐?" "예, 예." 자막은 부지중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학봉 처사의 말이 낭랑하게 이어졌다. "내 선계로 가는 길에 차마 못 본 체하기 어려워 되돌아왔노라." "예?" 자막은 놀란 눈을 들어 학봉 처사를 우러러보았다. "네 동생 자소는 멀지 않은 장래 고구려 백성들이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유리걸식할 때 앞길을 인도해 갈 재목이니라. 그러나." 학봉 처사는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듯 잠시 멈칫거리다 운을 뗐다. "인간의 수명이란 유한한 것. 만약 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너의 명이 줄어드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느냐?" 자막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제 동생 자소를 살려 주십시오." 그날 밤 삼경에 자막은 학봉 처사가 지시한 대로 혼자서 동생 자소를 업고 폐가로 스며들었다. 낮에는 살벌한 싸움으로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지만 밤에는 오히려 평상시에 느낄 수 없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오직 학봉 처사 방에 켜놓은 촛불만이 홀로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한동안 자소의 몸 이곳 저곳을 만지던 학봉 처사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독이 골수에 미치지는 않았구나." 긴장해서 학봉 처사의 거동만을 살피고 있던 자막이 곁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학봉 처사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생살을 찢고 어깨뼈의 독을 갉아 내야 할 것인즉, 그냥 시술하든가 삼을 달여 먹이든가는 네가 결정해라." "삼이라구요?" "삼을 다려 먹으면 전신이 마취가 되어 고통은 덜하지만 회복하는데 일 년이 걸리고, 그냥 하면 회복이 빨라 한 달 후면 기동할 수 있으나 고통을 견딜 것 같지 않구나." 그때였다. 혼절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자소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냥 해주십시오." "항우 장사라도 아픔을 견디지 못할 텐데.." "지금 전쟁 중입니다. 저는 하루빨리 낫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끌 끌." 학봉 처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혀를 찼다. 그날 밤 비밀히 진행된 시술은 첫 닭이 홰를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소는 뼈가 으깨지는 고통을 신음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참아 냈다. 학봉 처사가 칼로 자소의 뼈를 갉는 소리만이 방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쯤 후 어느 날 밤, 안시성 내 저잣거리에 뜻밖의 소동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집 한 채가 무너진 것이다. 잠을 깬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너진 집 가장자리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곧 관솔불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있었다. 구멍 속에서 사람이 기어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땅굴이다!" 이어서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물, 물." 성안 백성들은 즉시 물을 퍼다가 땅굴 입구에 계속 부어댔다. 땅굴을 통해 성안으로 침입하려던 수십 명의 당병들이 땅속에 갇혀 고스란히 수장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토산이었다. 당태종은 안시성 남쪽으로 500보의 거리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말이 토산이지 당군 모두가 밤낮으로 흙을 져다가 큰 산을 만드는 대역사, 무려 10만 명이 동원되어 이 짓을 하고 있었으니 천지개벽 이래 그때까지 이렇게 큰 역사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한 90여 일이 지나자 토산의 높이가 성채와 같아졌다. 그리고 토산이 높아질수록 성에 점차 가까워지더니 드디어 토산 산쪽이 성벽과 맞닿아 버렸다. 이젠 토산이 불화살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운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안시성에서도 부랴부랴 토산과 마주보는 쪽의 성벽을 돌을 나라다 높였다. 그럭저럭 성벽이 토산의 높이와 비슷해졌다. 그날 이후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있는 당병과 성벽 위에 있는 고구려 병사 사이에 매일같이 7,8차례씩 교전이 붙었다. 대등한 높이에서 서로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면서 하는 싸움은 양측 모두 무수한 사상자를 냈다. 당군의 작전은 안시성군의 병력수가 비교할 수 없이 적으므로 1 대 1로 밀어붙이면 머지 않아 안시성군이 전멸하게 된다는 계산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그러나 안시성으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어 안타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학봉 처사의 말대로 주느부 대형 자막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공방전이 한층 치열해져 가던 때였다. 공방전이 끝나면 토산과 성채 사이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토산계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온통 피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여 밤에는 꼭 필요한 보초만 성루에 세워 놓고 모두들 성책 밑에 막사를 지어 기거하고 있었다. 그날도 양쪽의 지친 병사들이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우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들렸다. 그날 따라 볼 일이 있어 들어갔던 자소는 성의 남쪽에서 들려오는 땅이 꺼지는 소리에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헐레벌떡 달려와 보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다만 당군의 토산이 성쪽으로 무너져 있었다. 토산은 일시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벽 아래 잠들어 있던 고구려 병사들을 남김없이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형님! 형님!"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들려 오는 소리가 없었다. 자소는 금방 형의 죽음을 알아차렸다. 주느부의 대형 자막은 뜻하지 않은 변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자소에게는 사사로이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성벽이 무너진 이상 남은 토산 꼭대기를 어느 편에서 먼저 장악하느냐에 따라 안시성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군이 먼저 토산 꼭대기를 차지하면 당군은 성벽이 무너져 버린 성안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최후의 순간 운명의 여신은 고구려의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바로 그날 토산을 지키고 있던 당장 부복애가 계집 생각이 나서, 인근의 말갈족 마을로 여자 사냥을 나갔던 것이다. 자소가 곧바로 결사대 수백 명을 이끌고 토산 위로 기어오르자 그때까지 살아 남아 있던 당병 수십 명이 저항해 왔다. 자소가 선두에서 칼을 빼들고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어 순식간에 열 대 여섯 놈을 꺼꾸러뜨렸다. 그 가운데는 당군의 명장 과의도 있었다. 갑자기 지휘자를 잃은 나머지 당병들은 우황좌왕하다가 토산 아래로 도망쳤다. 당태종 역시 진중에서 자다가 토산이 무너졌다는 보고를 받고 벌떡 일어나 급히 군대를 보냈으나 이미 토산 꼭대기에는 고구려군의 흑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고구려의 토산 정복은 참으로 간발의 차이였다. 토산은 새 흙을 가져다가 부어 놓은 것이라 발이 장딴지까지 빠지는데다 일시에 많은 병사들이 달라붙자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여 자기네들끼리 밟혀 죽은 자만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토산 위에서는 고구려 병사들이 긴 장대에 칼을 꽂아 좌우로 흔들면서, 진흙에 발이 빠져 어기적거리면서 기어오르는 당병의 목을 무 자르듯 잘라 댔다. 토산 전략은 당군의 마지막 카드였다. 이에 3일째 되던 날 당태종은 꼭두새벽부터 직접 선두에 나서 쉴 틈 없이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고 고구려 군사들이 횃불을 밝혀 주위가 다시 대낮같이 밝아졌을 때 당태종은 더 이상의 공격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던지 체념을 했다. 새벽부터 초저녁까지 진종일 토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당군 10여만이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토산은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었다. 어디 그뿐이랴. 중원 천하의 명장 설인귀, 이세적, 이도종, 왕예 등은 모두 부상을 입었고 독전차 현장에 나와 있던 당태종은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눈을 잃어버렸다. 3개원에 걸쳐 계속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던 안시성 최후의 전투는 그 규모나 참담함, 사상자수에 있어 세기의 기록을 남기면서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난 것이다. 기울어져 가는 고구려의 국운 안시성 전투가 끝난 뒤 고구려의 정국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펴라성에서 암암히 바라다 보이는 마읍산 앞 넓은 들녘에는 벼 이삭들이 황금 물결로 출렁거렸고, 다시 봄이 오면 유난히 맑은 오월의 햇살을 등지고 모심기를 했지만 옛날과 같은 흥겨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649년, 70고개를 넘은 양만춘 장군이 죽었다. 온 백성들이 상복을 입고 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며칠 동안 곡기를 끊었다. 심지어 양만춘 장군을 흠모한 나머지 뒤따라 죽는 백성들이 점차 늘어나자 나라에서는 이를 법으로 막기까지 했다. 당시 연씨 일족의 전제정치로 암담한 상황을 맞고 있던 백성들은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던 양만춘 장군마저 죽자 이젠 한줄기의 희망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보장왕 25년,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예상했던 대로 고구려 900년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었던 막리지 자리가 세습되었다. 즉 연개소문의 큰아들인 남생이 막리지 자리를 차고 들어섰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개소문의 25년간에 걸친 독재 무단정치에 염증을 느껴 오던 터였다. 남생이 막리지직을 세습, 그나마 명맥만 유지해 오던 900년 고구려의 5부 공화제 법통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보자 백성들은 점차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하늘은 고구려의 불의를 벌주기라도 하듯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 해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생의 막리지 세습에 불만을 품은 연기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는 자중지란까지 일어났다. 한편 당나라는 지난번 안시성 싸움에서 혼쭐이난지라 감히 고구려와 정면 승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태종은 안시 전역에서 겨우 몸만 살아서 돌아와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만 더 고구려를 건드려서 패전을 한다면 전대의 수 나라처럼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당태종도 천시가 있었던지 안시 전투 3년 후, 눈알이 빠진 오른쪽 눈의 상처가 나날이 깊어 가더니 드디어 뇌 속까지 파고들어 죽고 말았다. 죽으면서 그의 아들 고종에게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부디 이 아비의 철천지원수를 갚아다오." "..." 당태종이 임종하는 자리에서 고종은 숙연히 읍을 하고 꺼져가는 당태종의 유시를 듣고 있었다. "성급하게 싸우면 너도 이 아비처럼 죽는다. 알았느냐?" "예, 아버님." "10년이 걸려도 좋고 20년이 걸려도 좋다. 고구려를 끊임없이 한입씩 물어뜯어라.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엔가 때가 온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가래가 끓어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당태종은 숨을 거두었다. 당태종이 호랑이였다면 그의 아들 당고종은 승냥이었다. 그후로 당고종은 끊임없이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국경을 침략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조금씩 쇠약해져 갔다. 더구나 연개소문에서 남생 이르는 독재정치에 신물이 난 백성들은 점차 조정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연씨 정부에 의해 왕위에 오른 보장왕도 매일같이 주색에 빠져 지냈다. 그 즈음 무술시합을 통해 형 자막의 자리를 이어받은 자소는 죽은 양만춘 장군의 후임으로 안시성주에 올라 집을 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소의 집에 뜻밖의 일이 벌어져 펴라성의 두 아내 초혜와 나싸는 걱정에 싸여 있었다. "이 일을 어떡한다." 초혜는 혼자서 자문자답하여 한숨을 쉬었지만, 그렇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었다. 어제 아침나절에 궁궐의 병사들이 들이닥쳐 막내딸 나라를 입궁시키라는 전갈을 두고 갔던 것이다. 하필이면 나라가 보장왕의 후궁 후보자 명단에 끼었다는 것이었다. 초혜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후궁은 싫든 좋든 왕족이나 5부 대인들의 딸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일신의 출세에 눈먼 자들은 자신의 권세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딸을 희생시켰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일종의 볼모로 딸자식을 궁중에 들여보내야만 했다. 따라서 일개 대형의 직위로는 그러한 처사가 가당치도 않았던 것이다. '큰 딸 나영도 있고, 둘째 나선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막내 나라일까?' 더군다나 나라는 자모와 약혼중이었고, 이 사실은 펴라성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거의가 다 알고 있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지.' 그러나 초혜는 막내딸 나라가 이렇게 된 데에는 청혼을 거절당한 대대로 예불여상의 음험한 계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불여상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춘룡이 나라의 고운 자태에 정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딱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지체가 높은 자신이 일개 대형에게 청혼을 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던 판인데 거절까지 당하자 앙심을 품은 것이다. 도저히 그대로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마음먹은 그는 어느 날 보장왕을 꼬드겼다. 간신의 말은 역시 매끄러웠다. "대왕님, 이번 후궁 간택에 천하 절색을 뽑으심이 어떨는지요?" 보장왕도 남자인지라 호기심이 동하여 예불여상을 쳐다보았다. 예불여상은 뱁새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나라가 흥복이 있으려고 경국지색이 나타났습니다요." 천하 절색이란 세상에서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지만, 경국지색이란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나라가 송두리째 기울만큼 예쁘다는 뜻. 간신배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말은 표현부터가 한껏 과장되었다. 예불여상의 말을 들은 보장왕의 얼굴에 대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 그 처녀가 누구요?" "바로 주느부 대형 자소의 막내딸입니다." "그으래?" 그날로 궁중에서 자소의 집으로 전갈이 갔다. 예불여상은 자기가 취하지 못할 바에야 재라도 뿌리겠다는 심보였다. 일단 궁중에서 부르면 어느 누구와 정혼을 했더라도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것이 당신의 법도였으니까. 이렇게 되자 자소의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어머니 초혜는 일생을 궁궐 속에 갇혀 어둡게 살아야 할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라야, 너의 아버지는 외지에 나가 있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이제 겨우 열 다섯 살인 나라는 당돌한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딸의 말을 들은 어머니 초혜는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라야, 네 앞날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혀 흐느끼는 초혜를 오히려 나라가 위로했다. "어머니, 잘하면 내일 해질녘 안으로 돌아올 테니 염려 놓으세요." 다음날 아침 궁궐에서 꽃가마가 오고, 온 집안 식구들이 눈물을 찍어 댔지만 나라는 울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지어 집안 식구들을 위로했다. 나라를 태운 가마꾼들은 아리수를 돌아 궁궐로 향했다. 주느부에서 아리수를 끼고 궁궐로 가는 도중에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마가 그 곁을 지날 때 느티나무 뒤로 얼른 몸을 숨기는 소년이 있었다. 나라의 약혼자 자모였다. 자모는 나라를 태운 꽃가마가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15살 먹은 나라가 혼약을 맺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라는 자라면서 특별나게 인물이 고왔다. 갸름한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하고, 살짝 보조개가 팬 웃음을 머금을라치면 보는 사람들이 가슴속이 설렘으로 꿈틀댔다. 나라가 처녀티를 보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자, 어느덧 온 주느부 사람들은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큰길에라도 나타나면 주느부 사람들은 감탄을 하면서도 은근히 걱정들을 한마디씩 달았다. "여자가 너무 인물이 고와도 팔자가 드센 법인데." 이 낌새를 알아차린 아버지 자소도 막내딸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어 청혼이 들어오자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혼약을 서둘렀다. 마침 지난해 동맹 제삿날 소도 안에서 춤을 추는 나라를 보고 한눈에 정이 난 예불여상의 외아들 춘룡과 케르부 소형 자미의 아들 자모가 부모를 졸라 청혼을 넣었다. 이에 자소는 춘룡의 아비 예불여상이 소문난 간신배였기 때문에 청혼을 거절하고, 비록 가난하지만 성품이 곧은 자미의 큰아들 자모를 선택했던 것이다. 자모가 한숨을 꺼지게 쉬며 마악 발길을 돌리려는데 뜻밖에도 나라의 두 오빠 자수, 자영과 마주쳤다. 그들은 헐레벌떡 궁궐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생 나라가 강제로 끌려가는데 오빠들이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모도 얼른 그들 뒤를 따랐다. 그때쯤 나라는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 "옳지, 그거라면?" 나라는 가마 속에서 혼자 미소를 지었다. 나라를 태운 가마가 드디어 궁궐에 이르렀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잠시 후에 일어났다. 가마가 내전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불여상이 말한 경국지색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마 주위를 서성거려야만 했다. 당연히 가마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야 할 주인공 처녀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이 많은 궁인 하나가 가마문을 왈칵 잡아 젖혔다. 순간 가마를 둘러쌌던 궁인들이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가마 안에는 경국지색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사자가 축 늘어져 있었다. 궁인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뒤이어 남자 환관들이 몰려오고 내전 안뜰이 일시에 소란해졌다. 환관의 보고를 받은 보장왕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 앞에는 예불여상이 사색이 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소신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요." 예불여상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를 바닥에다 찧었다. 보장왕은 버럭 역정을 냈다. "그래, 그대는 그것을 몰랐단 말이오?" "예, 아니 원래 간질병이란 평소에는 멀쩡한 것이 되어서, 그만 잘못을 저질렀으니 소신을 죽여주소서." 예불여상은 입으로는 죽여 달라는 시늉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벌써 나라의 꾀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라가 기절해 있다는 보고를 받는 즉시 비밀리에 집에다 연락을 해두었다. 그날 오후, 나라를 태운 가마가 다시 궁궐을 나와 아리수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아리수를 못 미처 오림이라고 부르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가마꾼들이 오림에 들어섰을 때 복면을 한 서너 명의 장한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길을 막아서자 가마꾼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예불여상이 몰래 보낸 장한들이 우르르 가마로 다가섰다. "악!" 뒤이어 나라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려 오고 나라는 진짜로 까무라쳐 버렸다. 장한들은 그들이 준비해 온 가마에 사지가 늘어진 나라를 냉큼 싣고 유유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멀찍이서 뒤를 따르는 또 한 패의 젊은이들을 보지 못했다. 장한들이 아리수가의 늙은 느티나무 곁을 지날 때였다. "가마를 놓고 냉큼 꺼지지 못할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웬 젊은이 두 명이 느티나무 뒤에서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뭣이라고? 너희들은 또 누구냐?" 장한들은 우두머리인 듯싶은 팔자수염의 건장한 사내가 눈알을 부라렸다. "우리들은 처녀의 오빠들이다. 어제 알아듣겠느냐?" "처녀를 탈취한 이상 못 내놓겠다. 어쩔 테냐?" 장한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예불여상으로부터 추호의 실 수가 업도록 엄한 밀명을 받았던 것이다. 곧이어 양쪽에서 편싸움이 붙었다. 장한들은 예불여상의 종복 가운데서도 힘깨나 쓰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도 어려서부터 아버지 자소에게 무술을 훈련받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양편이 치고 받는 혼전이 벌어지고, 어느 사이 나타났는지 몽둥이를 든 자모도 한몫 거들고 있었다. 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한들은 자소의 아들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마를 탈취한 두 오빠와 자모는 나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종복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예불여상은 분을 참지 못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디 두고 보자." 불똥은 기어코 나라의 아버지 자소에게 튀었다. 다음날 아침 에불여상은 막리지 남생을 찾아갔다. "막리지 각하, 안시성의 자소를 두고만 보시렵니까?" 영문을 모르는 남생은 두 눈만 멀뚱거리며 예불여상을 쳐다보았다. "막리지 연개소문 시절에도 양만춘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또 자소와 같은 고지식한 인물을 그 자리에 박아 놓다니요. 만약에 그가 등을 돌려 펴라성으로 진군이라도 하는 날이면" 천성이 경박한 남생이 생각해 보아도 예불여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날로 자소는 안시성주에서 해임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자소와 같은 유능한 장수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고, 간신배들만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었다. 정녕 고구려의 운이 다해 버린 것일까? 남생이 막리지를 세습한 이후 모든 일들이 마치 예정된 순서를 밟아 나가듯 진행되고 있었다. 남생은 백성들이 술렁거리자 군사들마저 동요할까 봐 이를 무마할 목적으로 요동 지방의 여러 성을 순찰하러 떠났다. 아버지 연개소문의 본을 받아 철저하게 친인척 정치를 하고 있던 남생은 자신이 펴라성을 떠나 있는 동안 당연히 두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국정 정치을 대신케 했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느때고 간신배가 들끓는 법이다. 어느 날, 간신배 한 명이 남건과 남산을 찾았다. 행동이 간사스럽다고 하여 남생이 멀리하던 남산의 장인 고사지였다. 그자는 뱁새눈을 꿈벅거리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먼저 계획을 세우십시오." "계획?" 고사지는 영문을 모른 채 멀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건과 남산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지금 막리지가 두 아우를 제거하려고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남건과 남산이 펄쩍 뛰었다. "우리 형 남생이 동생들을 미워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고사지는 사전에 당나라로부터 몰래 금은보화를 받고 계획적으로 일을 꾸미고 있는 터였다. 당나라는 수 나라 때부터 무려 70년 동안이나 고구려에 눌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자 마지막으로 중국인 특유의 휼계를 동원했던 것이다. 첩자를 고구려로 보내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펴라성의 동부욕살 고사지가 평소 물욕이 많음을 알아내고 비밀리에 황금 2만냥으로 욕심에 불을 붙인 후 펴라성에 남아 있는 남건과 남산을 꾀도록 한 것이다. 고사지는 타고난 모사꾼이어서 그쯤해서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두고 보십시오. 남생이 돌아오면 권력을 모조리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습니다." 옛말에 십벌지목이라고 했던가. 같은 소리도 여러 번 들으니 아둔한 남건과 남산은 점차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 "먼저 손을 쓰셔야지요." "어떻게?" "왕명으로 급히 막리지 남생을 불러 보십시오. 그때 가면 저절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고사지는 이미 첩자를 시켜 같은 시각에 남생에게도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남생도 펄쩍 놀랐다. "뭐? 남건과 남산이 나를 배반하려 한다고?" "그러하옵니다." "공연히 허튼 말을 지껄이면 당장 네 목을 베어 버리겠다." "정히 못 믿으시면 몰래 밀정을 펴라성에 보내 보십시오. 그런 연후에 제 목을 치셔도 늦지 않습니다." "좋다" 마침내 마음이 흔들린 남생은 심복을 펴라성으로 보내 몰래 남건과 남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벌써 남생측에 가 있던 남건, 남산측의 첩자가 펴라성의 고사지에게 이 사실을 즉시 알려 왔다. 고사지는 일이 뜻대로 성사되어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좋아서 손뼉을 쳤다. 남생이 보낸 정탐꾼은 펴라성에 들어서자마자 붙들렸다. "너 이놈! 남생이 우리를 정탐하러 보낸 밀정이 맞지?" 정탐꾼은 처음에는 잡아뗐으나 고사지의 무지막지한 고문에 못 이겨 남생이 보낸 첩자임을 토설해 버렸다. '과연, 당나라에서 시킨 계교가 들어 맞는구나!' 고사는 혼자서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고사지는 다시 한 번 남생이 정탐꾼을 닦달했다. "그래, 남생이 너를 보낸 이유가 뭐냐?" 모진 고문을 받아 널브러진 첩자의 입에서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나왔다. "동생들이 모반하려는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네 말이 정녕 틀림없으렷다." 첩자의 대답도 고사지의 추상같은 호령만큼이나 확실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고사지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이 정도 가지고는 일이 안 되겠는걸.' 그는 피투성이가 된 남생의 첩자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부드러운 말씨로 달랬다. "너는 어차피 죽을 목숨, 내가 시키는 대로하면 너의 목숨도 구하고 내가 큰 상금을 주겠다." 남생이 보낸 정탐꾼은 고사지의 회유에 넘어가 남건과 남산 앞으로 끌려가자 고사지가 꾸민 대로 대답을 해버렸다. "예, 막리지께서 동생들을 죽이려고 군사를 동원하려는데 저보고 펴라성으로 먼저 가서 내응하라고 했습니다." 곧이들은 남건과 남산은 분노로 떨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남건은 곧바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보장왕에게 간청을 해 형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그런 다음 남생을 불렀다. 그때즘 남생도 펴라성에서 일어난 내막을 전해들은 터여서 펴라성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왕명에 따를 수가 없었다. 남생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 남건과 남산은 군사를 일으켜 형 남생을 죽이려고 요동으로 향했다. 동생들에게 쫓겨 몇 번씩이나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남생은 겨우 압록수 가의 국내성으로 달아났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나! 900년 사직의 고구려가 드디어 망하는구나." 마침내 남생은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목숨을 애걸했다. 모든 일이 흉계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당고종은 즉시 좌효위대장군 설필하력을 시켜 국내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던 남건, 남산의 고구려병을 뚫고 남생의 몸을 빼내어 당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당나라는 드디어 그들의 천추의 한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내분으로 국력이 분열되었다 하더라도 당나라 혼자 힘으로 고구려를 상대해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병참선이 긴 당나라로서는 100만 명의 대군이 몇 달씩 버텨 나갈 군량이 걱정이었다. 싸우다가 군량이 모자라면 저 살수나 안시성의 싸움에서처럼 100만의 대군이 한꺼번에 몰살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래서 당고종은 신라의 문무왕에게 하명을 했다. 하명을 받은 문무왕은 즉시 사신을 보냈다. 당태종은 사신을 대하자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대의 나라는 군량을 어김없이 조달할 수 있겠소?" "예, 죽기를 각오하고 이행하겠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되면 후한 상을 내리겠소." 승냥이 같은 당고종은 생색을 냈다. "고구려를 정복하는 날, 펴라성 이남을 신라에게 넘겨주겠소." 신라의 사신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 펴라성 이북과 드넓은 요동땅의 고구려 강역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 당나라의 것이 되오." "그렇지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신라가 그토록 고구려를 없애 달라고 애원을 하기에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것. 이후부터 아무 소리하지 마시오." 당고종은 엄포를 놓고는 신라의 사신을 노려보며, 아비인 당태종을 닮아 미륵같이 처진 볼을 실룩거렸다. 주눅이 든 사신은 연방 허리를 굽실거렸다. "예, 예" 오직 고구려를 없애 버리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던 신라로서는 당고종의 말을 거역하고 나설 형편이 못 되었다. 신라는 선대 태종무열왕 때부터 당태종에게 고구려를 쳐 없애달라고 면구스러울 정도로 애원을 했었다. 그래서 교활한 당나라가 그 넓은 만주 벌판과 대동강 이북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선심을 쓰듯 나머지 조그만 땅덩이를 신라에게 떼어 준다고 해도 대들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생, 남건, 남산 삼형제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하게 되자 민심도 흉흉했다. 벌써부터 백성들 사이에는 기괴한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시조 동명왕의 소상이 3일 동안 피를 흘렸다." 보장왕 7년에는 이런 소문도 떠돌았다. "펴라성의 한 백성이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더욱 기괴한 일은 보장왕 13년, 몇몇 사람들이 마령 위에서 신인을 보았는데 그 신인의 말이 "너희 군신의 사치가 도를 넘으니 패망할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보장왕 15녀 5월에는 서울 펴라성에 쇠비가 내렸다. 또 18년 9월에는 백주 대낮에 호랑이 9마리가 한꺼번에 펴라성 안으로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해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자세한 내막은 이러했다. 호랑이 9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 펴라성은 높이 12자가 넘는 석축으로 견고하게 둘러쳐 있고, 동서남북 성문에는 병사들이 밤낮으로 파수를 보건만 어떻게 호랑이 떼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성안으로 들어온 호랑이들은 좁은 골목길을 쏜쌀같이 질주하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뜯어 잡아먹었다. 호랑이들은 배가 부르자 입맛을 다시며 피가 묻은 아가리를 쩍 버리고는 펴라성이 떠나갈 듯 포효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온 성안이 공포에 휩싸였다. 겁에 질린 백성들은 방 문고리를 잠그고 벌벌 떨며 숨을 죽였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연씨 집정부 근위병들이 동원되었지만, 그때는 벌써 성안 백성 54명이 호랑이의 공격을 받아 절명한 뒤였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출동한 근위병들이 호랑이에게 덤벼들어 사생결단을 할 생각은 않고 떼로 몰려다니며 호랑이의 뒤만 쫓고 있는 형편이었다. 연씨 집정부는 위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썩을 때로 썩어 모두들 자기 몸사리기에 바빴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사람 고기로 포식을 한 호랑이 떼는 얼어 놓은 성문을 통해 유유히 사라졌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자소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한번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는 사람 맛에 미쳐서 계속 사람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호랑이 떼는 언제 또다시 성안으로 들어올지 예측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자소는 평소 성품이 강직한 대청군, 을불수, 고문간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그날로 호랑이의 소굴인 마읍산으로 향했다. 마읍산을 골짜기가 깊고 수목들이 우거져 한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자소 등이 마읍산 골짜기로 들어서자 큰 바위 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노란 바탕에 얼룩무늬를 한 호랑이는 황소만했다. 자소가 칼을 뽑아 들고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자 호랑이는 야생동물 특유의 민감한 감각으로 사람 냄새를 맡고는 벌떡 일어섰다. 자소를 쳐다보는 호랑이의 눈알에 번쩍 섬광이 흘렀다. 호랑이는 공격 직전에 으레 그러하듯 앞발을 모으고 자세를 낮췄다. 자소도 다시 한 번 칼자루에 힘을 모았다. 휙 - 해를 가리며 번개처럼 공중을 나는 것이 있었다. 전광석화 같은 호랑이의 몸놀림에 자소는 미처 칼을 내려칠 사이가 없었다. 자소는 엉겁결에 호랑이의 날카로운 앞 발톱을 피해 몸통 속으로 파고들며 두 팔로 호랑이의 목을 끌어 안았다. 과연 호랑이는 백수의 왕자답게 기운이 대단했다. 호랑이는 자소를 떼어 내려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소도 호랑이와 뒤엉켜 벌써 몇 번째 가파른 비탈을 굴러내렸다. 자소는 경황중에도 점차 팔뚝에 힘을 더해 호랑이의 목을 조여 갔다. 마침내 발버둥치던 호랑이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사지를 늘어뜨렸다. 대청군, 을불수, 고문간 열시 호랑이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청군은 이미 사납게 덤비는 호랑이 한 마리를 단도로 찔러 죽이고 두 번째 호랑이와 맞붙어 있는 중이었다. 대청군은 연씨 집정부에 의해 기껏 소형 벼슬에 있었지만 타고난 장사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대상연이 이름난 청백리라 집안이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 농토라고는 펴라성 서문 밖에 다섯 마지기의 논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어 소출이 절반밖에 안 되었다. 하루는 논으로 일을 나간 대청군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이 찾아 나섰더니 이제 겨우 15살짜리 대청군이 용을 쓰며 논에 박혀 있던 바위를 뽑아 내고 있었다. 황소를 동원해도 꿈쩍 안 했던 바위들이 대청군의 손에 번쩍 들려졌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대청군은 온 고을에 천하장사로 알려졌다. 오월 단옷날 벌이는 씨름판에는 인근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사들이 몰려들었지만 일등은 아예 대청군 몫이고 이등 자리를 놓고 그들끼리 힘 자랑을 하는 실정이었다. 호랑이를 목 졸라 죽인 자소가 기진맥진해서 막 일어서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대청군이 한창 호랑이와 격투를 벌이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한 마리의 호랑이가 대청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앗, 대청군이!" 자소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간발의 차이였다. 대청군에게 달려든 호랑이가 공중을 한바퀴 돌더니 땅바닥에 펄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절대절명의 순간 대청군이 뒷발질을 해서 달려드는 호랑이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순간을 놓칠세라 자소가 호랑이 위로 올라타서 칼로 목을 찔렀다. 이렇게 해서 호랑이 여섯 마리를 어렵게 처치하고 한숨을 돌리는데 나머지 세 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들은 이미 낌새를 챘는지 멀찍이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는 산을 울릴 만큼 포효를 하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자소 일은 죽은 호랑이의 배를 갈라 그때까지 소화가 덜된 내용물 가져다 합동장례를 지러 주었다. 그 후 호랑이가 출몰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이상스런 조짐은 계속되고 있었다. 보장왕 19년 7월에는 펴라성의 바닷물이 3일 동안 핏빛처럼 붉었다. 이 모든 조짐들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어서 불안한 민심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량에 대해서 신라의 확약을 받은 당나라는 드디어 국력을 다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고구려 보장왕 25년 9월, 당고종은 항복한 남생을 불렀다. "내 그대를 특진 요동도독겸 펴라도안무대사를 삼고 따로 현도군공에 봉한다." 중국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던 남생은 하루아침에 감투를 쓰자 감격했다. "황제폐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당고종은 남생을 최대한 이용할 속셈이었다. "그대는 이번 고구려 정벌에 앞장서겠는가?" "예, 예.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그 해 12월, 당나라는 드디어 남생을 앞세우고 대병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의 100만이 넘는 대군은 다시 위세를 갖추어 요하를 건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전쟁이나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 전투와는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살수와 안시성 전투 때만 하더라도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 관계에 있었다. 당나라와 한통속이 되어 있는 신라는 고구려로 출병을 하면 그 빈틈을 노려 백제가 침략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구려를 넘보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백제의 견제 덕분에 남쪽 전선이 크게 염려없었으므로 고구려는 오로지 수 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대해서만 전력을 다해 싸워 번번이 이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은 웬일인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망해 가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더욱이 백제가 망하고 복신 장군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백제가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도 남생은 백제를 돕지 않았다. 그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평범한 진리도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백제라는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고구려는 서쪽의 당나라와 남쪽의 신라라는 두 적을 동시에 맞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국면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의 내부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친 독재정치로 백성들의 사기가 전과는 달리 땅에 떨어졌다. 더욱이 막리지였던 남생이 당나라에 빌붙어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침략해 오자 이것을 본 고구려 백성들은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피 흘려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져 있었다. 보장왕 26년(668). 만사가 당군의 뜻대로 되어 갔다. 그해 9월, 자소의 막내딸 나라가 간질병을 앓는 것처럼 꾀를 내어 후궁 간택에서 빠져 나온 바로 그 무렵, 당군 이세적은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인 신성을 간단히 손에 넣었다. 이세적이 성 밑에 와서 공격을 퍼붓자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신성 수비군 부장 사부구란 자가 성주를 묶어 놓고 성문을 활짝 열고 나와 항복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신성 주변의 16개 성도 화살 한번 쏘지 안고 당군에게 모두 항복해 버렸다. 뒤늦게 신성이 함락된 것을 안 막리지 남건이 군사를 몰고 와 신성을 장악한 당군 고간을 금산에서 쳐서 다시 탈환했으나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온 설인귀에게 도리어 패해 새로이 성 셋을 잃어버렸다. 남건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자 달아나 버렸다. 이때 당군에는 행군관기통사사인의 직책에 있었던 원만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선대에 고구려에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었다. 고구려군이 이렇다 할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래서 남건에게 비밀히 편지를 보내 그의 무책을 나무라고 압록강의 천험을 지키도록 귀띔을 해주었다. 그제서야 남건은 군사를 몰아 압록강을 지켜, 당나라 군사들이 감히 강을 건너오지 못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안 당고종은 즉시 원만경을 파직하고 영남으로 귀양 보냈다. 한편 요동도행군대총관 부장 학처준의 10만 병사가 안시성 방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학처준이 안시성 아래 당도해 미처 진열을 갖추기도 전에 안시성군 3만여 명이 불시에 성문을 열고 쏘아져 나와 공격하는 바람에 대패했다. 상에 걸터앉아 밥을 먹던 학처준은 고구려군의 급습을 받고 숟가락을 쥔 채 도망가기에 바빴던 것이다. 양만춘 장군이 100만의 당태종군을 물리친 안시성이 다시 한 번 고구려를 구했다. 당군은 압록강에서 막히고 안시성에서 다시 한 번 패하자 급박하게 조여 오던 전선에 힘이 풀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한때 최전방이던 요동의 신성 부근까지도 거의 회복할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몸이 달아오른 것은 당나라가 아니고 신라였다. 신라의 문무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큰 아들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고 있는 김유신을 불러 대좌를 하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러다가는 고구려가 되살아나는 것 아니오?" 김유신은 당대의 전략가였다. "마지막 처방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뭣이오?" "식량만 대줄 게 아니라 아주 참전을 하는 것입니다." "참전?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문무왕은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내비쳤다. "어떻게 하면 고구려가 무너지고 난 다음 그 땅이 송두리째 우리가 차지가 될 수 있겠소?" 문무왕은 엉겁결에 당고종에게 승낙하고 만 강역 문제에 민족의 앞날이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 그는 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태반이 당나라 땅이 될 것입니다." 문무왕은 난감했던지 침묵했다. 노신 김유신이 근심스런 얼굴로 문무왕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이시다면 참전을 하십시오." "음-." 문무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전날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연개소문을 찾아가 옥에 갇히고 핍박받았던 수모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영토 문제는 그때 가서 당나라와 상의해서 해결합시다." 김유신은 그때 나이가 60이 넘어 있었다. 문무왕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궁궐을 나오는 김유신의 마음은 어쩐지 허전했다. 비좁은 한반도 안으로 움츠러들어 다시는 기를 펴지 못할 한민족의 먼 장래가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얼마 후, 당군에게 군량만을 대고 있던 신라는 젊어서부터 중국에 유학을 한 바 있는 친당파 김인문에게 대병을 주어 당군을 돕도록 했고, 신라의 원군에 힘을 얻은 당군은 흐트러진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고구려가 망하던 해인 보장왕 27년 정월, 당나라는 유인궤로 요동도부대총관을 삼고 학처준과 신라 장수 김인문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다시 공격해 왔다. 그해 2월, 이세적 등이 요동으로 나와 고구려의 부여성을 쳐 빼앗았고, 이어서 선봉장 설인귀가 금산으로 나와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기니 연개소문의 족벌정치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던 부여도의 40여 고구려 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모두 항복해 버렸다. 오직 남건만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다시 탈환하려고 했으나 설하수에게 이세적 등에게 패하여 압록수 쪽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죽은 고구려 병사는 3만 명이나 되었다. 땅이 울고 하늘이 슬퍼했으리라. 이세적은 전세를 몰아 압록수 바로 위에 있는 대행성으로 총집결했다. 그리고 목전에 있는 압록책을 넘어 곧바로 고구려의 수도 펴라성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제 요동 전역을 잃어버린 고구려는 올가미에 목이 졸린 호랑이 꼴이 된 셈이었다. 이때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이 전황 보고차 요동 전역에서 당나라 서울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고종은 가언충을 대면하자마자 요동 전역부터 물었다. "요동의 군세가 어떤고?" "예, 잘되어 갑니다." "잘되어 가다니?" 당고종이 짐짓 놀란 체하자 가언충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어째서?" "옛날 선제 태종께서 거듭 치욕의 참패를 당한 것은 그때 고구려가 일심단결해 있어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생 형제들끼리 틈이 생겨 우리의 앞잡이가 되어 적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또"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렇습니다. 고구려의 비기에 900년이 채 못 되어 80세의 대장에게 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편 총대장 이세적의 나이가 올해 꼭 80세입니다." "그 밖에는?" "예, 고구려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늑대와 여우들이 성안까지 들어오고 또 들쥐들이 들끊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잠깐! 한 가지가 빠졌구나." "예?" "무엇보다 군량미가 넉넉하다는 사실이다. 신라가 가까운 곳에서 군량을 보내 오고 또 참전을 한다니 이젠 승산이 있다." "그럼, 그 넓은 요동땅이 신라에게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다 우리 차지가 된다." 가언충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며 침을 삼켰다. "그럼 무엇 때문에 신라가?" "글쎄 말이다. 오랑캐들은 자기들끼리도 으르렁거리면서 서로 잡아먹느니라. 흐흐흐." 당고종은 모처럼 호쾌하게 웃어 젖혔다. 고구려 펴라성 주느부 대형 자소도 어느덧 43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연개소문 집권 이후 중앙군제를 택해 5부가 각각 독립해 있던 군제가 허울만 남아 있더니,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집권하고부터는 그나마 허울뿐이던 각 부의 군사 조직마저 없애 버렸다. 자소는 대형이 된 후 잠시 안시성에 가 있었지만 그것도 예불여상의 모함을 받아 집에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다. 간신 예불여상이 조정에 버티고 있는 한 자소가 중용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자소는 끊임없이 침략해 오는 당나라와 기울어져 가는 나라 꼴을 볼 때마다 비통한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비록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자소의 피는 여전히 안시성 전투 때처럼 뜨겁게 끓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연씨 집정부를 찾아가 출전을 자원했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에게 번번이 거절만 당했다. "자소, 그대는 싸우기에 너무 늙었소." "아닙니다. 아직도 한 손으로 무쇠 300근을 들고 활로 100밖의 버들잎을 쏘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대말고도 고구려에는 젊고 훌륭한 대장이 많소. 집에서 편히 쉬기나 하시오." "정 그러시다면 . 제 생각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생각?" "예, 이번 전쟁은 지난번의 살수나 안시성 전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뒤에는 백제를 쳐서 빼앗은 신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라와의 국경에 군사를 더 배치하여 군량선을 끊고, 그리고 요동은 공성 작전을 펴야만 합니다." "오호, 공성 작전이라" "그렇습니다. 성을 비우고 후퇴하는 척하면서 달려들어 싸우고, 싸우는 척하면서 슬며시 후퇴하여 압록수까지 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사이 당군도 기진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측에서는 정병 5만을 따로 요동에 상륙시켜 일거에 요동도와 부여도를 차단해 버리면 독 안에 든 당군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건은 듣는 체도 안했지만 자소는 그래도 열심히 설명을 했다. "지금처럼 요동벌에서 5배가 넘는 당군과 정면 대결하면 필연코 우리측 군사들 군사들이 먼저 기진하여 나중에 펴라성마저 위태할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남건은 자소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구려. 그러면 그렇게 전략을 잘 아는 자소 대형은 어찌하여 안시성 싸움에서 다 잡은 당태종을 놓쳤소?" 자소도 할말이 없었다. 당시 응원군을 보내지 않은 자기네들의 과실은 쏙 빼버리고 오히려 몰아세우는 데야 침묵할 수 밖에.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태는 심상치 않았다. 고구려의 전 병력이라야 기껏 30만. 그 중 10만 명은 막리지 남건이 무능한 족벌 장수들을 끌고 요동 벌판에서 100만 당군과 무모하게 대결하다가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20여만 명으로 펴라성도 지키고 압록수도 방어해야 하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압록강에서 펴라성까지 사태가 더욱 절망적이 되자 연씨 형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던지 막리지 남건이 집권하고서부터 찬밥신세가 되었던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물론 그 중에는 자소도 끼어 있었다. 자소는 다 장성한 두 아들 자수와 자영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갔다.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대대로 남산이 이들을 맞았다. "자소 장군! 안시성 전투에서 장군이 보여준 천고에 빛나는 전과를 늘 흠모해 오던 터이오." 자소는 기가 막혔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과분한 말씀이오. 무위도식하고 있던 필부를 이렇게 불러 주시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수인사만 마치고 자소는 오랜만에 자기의 직속 상관이었던 주느부의 대인 안승강을 찾아보았다. 그도 이제 80이 넘어 연씨 정부에서 주는 대로의 벼슬에 있었지만 실제로 아무런 권한도 없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자소가 진정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은 대대로 남산이나 대로 안승강이 아니었다. 직접 보장왕을 뵙고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말을 하여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씨 정부는 보장왕과의 외부 접촉을 철저히 막아 연씨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자소는하는 수 없이 대로 안승강이라도 만나서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안 대로님, 자소가 문안드립니다." "자소 대형 아닌가?" "예, 여러 해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은밀히 드릴 말씀이..." 대로 안승강은 반가워하면서도 나이 탓인지 전보다 초췌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도 근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자소 대형,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안승강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나라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구려..." "아닙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기회가." "어떻게? 어서 말해 보게, 자소 대형." 자소는 눈을 들어 안승강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첫째는 임금님께 아뢰어 연씨의 무단정부를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5부 공화제를 다시 부활하여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대로 안승강은 자소의 말에 흠칫 놀랐지만 그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안승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엔?" "이제 고구려 독자적으로 당군과 신라군의 공격을 막기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압록책이 무너진다고 해도 펴라성에서 6개월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왜에 사신을 보내 지난번 백제를 구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왜와 우리의 뿌리가 먼 옛날 동족임을 들어 설득하면, 왜는 대병을 끌고 신라의 서울 서라벌을 침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는 발이 묶이게 되어 우선 남쪽은 염려를 놓게 됩니다." "듣고 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네만은..." "제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예 2만 명을 요동에 상륙시켜 아직도 당군에 항복하지 않고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안시성 등 몇몇 성과 힘을 모아 당군의 퇴로를 끊어 버리면 ..." "아, 이제야 알겠네. 그러나..." 대로 안승강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도 보장왕에게 나아가 설득할 힘이 없었다. 설혹 설득할 수 있다 할지라도 보장왕 자신이 국가 대사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권도 쥐고 있지 못했다. 자소와 안승강 사이에 한참 비통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안승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소 대형." "예." "연씨 정부를 그대로 두고는 일이 안 되겠나?" 자소도 왜 안승강이 그런 물음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자소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연씨 정부가 있는 한 백성들이 한 사람도 목숨을 바쳐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안승강의 입에서도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운이 다한 걸세. 백제에는 성충과 계백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 조정에는 그런 사람도 없네. 이제 우리끼리 싸우다 죽는 길만 남았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조국 고구려를 위해서 싸우는 걸세." 안승강은 잠시 말을 끊고 자소의 얼굴을 살폈다. 이어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떨어졌다. "자네는 아직 젊으니 내일 서둘러 출전해 주게나." 다음날 자소는두 아들 자수와 자영 그리고 옛날 함께 적진을 누볐던 몇몇 장수들과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날따라 때아닌 세설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과 말들이 눈발 사이로 허연 입김을 뿜어냈다. 자소는 떨려 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떠나기 전날 밤, 두 아내와 어린 자식들 모두 죽여 뒷 근심을 없앨까 하고 생각했지만 자소는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모질게 목숨을 이어 가야만 훗날을 다시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소 일행이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압록책과 200여 리 떨어져 있는 욕이성에 다다랐을 무렵 첫 비보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압록책도 무너지고 그곳을 지키던 우리 군사 10만이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자소 일행이 욕이성에 도착하여 보니 성내는 벌써 아비규환이었다. 당군에게 밀려 쫓긴 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대고, 거기다가 쫓겨온 우리측 군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리측 군사들 중에는 부상병이 절반을 넘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 왔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공포에 질리고 배가 고파 울부짖는 소리가 성안을 가득 메웠다. 법도 없고 질서도 없이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마침 성안에는 막리지 남건이 목숨을 부지하여 이곳에 피신해 있었다. 자소 일행은 우선 막리지 남건이 머물러 있다는 성주의 객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건은 자소를 보자 대뜸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응, 자소 대형 아니오? 잘 왔소, 잘 왔어. 어서 펴라성으로 돌아갑시다." 허둥대는 폼이 막리지 남건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소는 가만히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막리지! 펴라성으로 후퇴를 하다니요? 아니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뭐이라고?" "이 욕이성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살수의 천험의 지리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펴라성까지는 아직도 20여 개의 성들이 건재해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죽기로 싸우면 하느님과 주몽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막리지 남건은 자소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질렀다. "자소 대형! 지금 정신이 있소 없소? 당군이 우리 코앞에 와 있단 말이오." 자소는 순간 피가 뻗쳐 몸이 부르르 떨려 왔지만 꾹 참고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막리지, 아직도 우리에겐 2만여 명의 군사가 남아 있습니다. 만약 펴라성으로 후퇴를 하면 나머지 20여 성도 저절로 무너져 펴라성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펴라성 한곳에서 아무리 버틴다한들..." 그때 남건의 고함소리가 자소의 말을 잘랐다. "듣기 싫소. 남고 싶으면 그대나 남으시오!" 자소는 불끈하는 성질에 남건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적의 코앞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소가 분을 꾹 누르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어디선가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살수 북쪽 강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 당군의 붉은 군복과 5색 기치가 무수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건을 쫓는 당군의 선발대였다. 그때의 시각이 어느덧 유시(오후 5시) 자소가 살펴보니 당군은 위험이 따르는 도하 작전을 피하고 살수 북쪽 백사장에서 하룻밤을 묵을 작정인지 둔병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자소는 발길을 돌려 다시 한 번 막리지 남건을 찾았다. "지금 나머지 군사들을 몰고 성 남문을 통해 도망가는 척하면서 뒷산 너머에 매복시켜 두고 살수 상류에 있는 각 성에 급히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군사를 배에 실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 미명에 당군이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일시에 배를 띄워 강을 건너는 당군을 사살하면 그들은 금방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측에서..." 자소는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북을 쳐 뒷산에 매복시켜 둔 군사를 풀어 강을 건너는 당군을 덮치면 당군도 어 이상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 8월, 앞으로 두 달만 버티면 당군은 추위와 군량 때문에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퇴각할 것이니 그때 가서 여유를 가지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 알겠소. 그만하시오." 자소는 있는 힘을 다해 설득하는데도 남건은 건성으로 듣는 척만 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날 밤 자정쯤 욕이성의 남문이 소리도 없이 여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성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가 남쪽으로 달아났다. 막리지 남건이 밤을 타 도망을 친 것이다. 자소는 이 사살을 알고 있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제서야 자소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도 그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새면 당군은 곧바로 욕이성으로 밀어닥칠 것이었다. 자소는 한밤중에 성안을 돌아다니면서 싸울 만한 군사들을 추려 보니 겨우 500여 명. 욕이성이 아무리 작은 성일망정 500여명의 군졸을 가지고 대병의 당군을 막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500명의 병사도 애초에 욕이성에 소속되어 있던 군대로서 차마 부모와 처자식을 버려 두고 남건을 따라 도망칠 수 없어 어쩌지 못하고 엉거주춤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자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우선 더 많은 수의 병졸이 필요했다. 군사가 아니더라도 백성들 중에서 싸울 수 있을 만한 중늙은이들까지 전부 모았다. 이럭저럭 2천 명이 조금 넘었다. 20여 년전 안시성 전투 때의 신화 같은 자소의 이름을 아직도 많은 백성들이 기억하고 있어 순순히 응해 준 것만도 고마웠다. 다행스럽게도 막리지 남건을 따라 도망치지 않은 고구려 장수가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은 그날 펴라성에서 자소와 함께 욕이성까지 온 주느부 소형 을불수, 케르부 주부 온상덕, 대청군, 사느부 소형 고문간 등이었다. 그들 역시 연씨 정부가 들어서면서 밀려난 사람들이었지만 한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는 각오가 벌써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지사들이었다. 어차피 애초부터 진 싸움이었다. 그러나 자소는 이곳에서 최대한도로 버텨야만 막리지 남건이 펴라성으로 들어가서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자소는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성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자는 그런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았다. 이 조그만 성에서 싸울 때까지 싸우다가 가급적이면 많은 수의 병사들이 살아 남아서 후일 더 큰 장소에서 다시 싸우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소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답하기만 했다. 10만 명의 당군 척후대에 대항할 수 있는 욕이성 병력은 겨우 오합지졸 2천 명, 그나마 많은 수가 부상병에다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백성들이라서 이틀은 커녕 2시간도 버틸 성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당군의 도하 작전이 예상되는 새벽이 오려면 겨우 한 시간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소는 절망감으로 자꾸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다.' 자소는 서둘러 병력을 나눠 성의 동서남북 방향에다 배치한 후 따로 성한 군사 400명을 뽑아 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결사대를 누가 지휘할 것인가. 그때 사느부 소형 고문간이 자원하고나섰다. "자소 대형, 저를 보내 주십시오." "..." 자소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고문간의 말소리에는 평소 때와는 달리 열기가 넘쳐 있었다. "어차피 이곳까지 올 때는 죽기를 각오한 목숨입니다." 고문간은 자소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출전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자소가 중년이 다 된 고문간을 차마 사지로 보낼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사이를 가로막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아버님, 제가 가겠습니다." 자소의 큰 아들 자수였다. 자수의 눈빛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자소는 침묵했다. 그러나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거라, 자수야. 그리고 힘껏 싸워라. 남아로 태어나 죽을 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날 인시(새벽 5시경), 드디어 예상대로 당군의 살수 도하 작전이 개시되었다. 70여 년 전 을지문덕 장군이 113만의 수나라 군사를 일거에 몰살시켜 수장해 버린 이곳 살수는 그날 따라 옛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결만 드높았다. 군사 배치를 막 끝낸 자소는 서쪽 성루로 올라갔다. 당군의 한 떼가 벌서 살수를 건너오고 있었다. 마침 그해 때아닌 장마가 들어 강물이 불어나 제법 물살이 세었다. 당군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당군의 척후대는 필사적으로 강을 건넜다. 살수를 건너는 당병의 선봉이 가까스로 살수 남쪽 기슭에 닿을 무렵이었다. 둥 둥 둥 ... 난데없는 북소리가 새벽공기를 갈랐다. 뒤이어 욕이성의 서문이 활짝 열리며 한떼의 기마병이 쏜살깥이 백사장으로 치달렸다. 기마병들은 마침 강을 건너오느라 지친 당군을 불시에 덮쳤다. 조용하던 백사장이 금방 양쪽 군사들로 뒤엉켜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손에 땀을 쥐며 성루에서 내려다보는 고구려 군사들이 보기에도 싸움은 분명히 우리쪽 결사대가 우세였다. 성루에 있는 우리측 병사들의 입에서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고구려 만만세!" 당군의 붉은색 군복이 강가로 밀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검정색의 고구려 병사들이 백사장을 차지해 버렸다. 불과 한식경 남짓한 짧은 시간에 자수의 결사대는 2천여 명의 당군을 베어 버렸던 것이다. 압록책에서부터 연전연승하며 도망치는 막리지 남건을 뒤쫓아 추격해 오던 당군은 갑자기 표범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욕이성의 결사대에게 예봉이 꺾였다. 그러나 당군은 100만의 대병, 더군다나 선봉은 80세의 백전노장 이세적이었다. 초전에 실패했다고 해서 작전을 바꿀 그들이 아니었다. 잠시 주춤해 보이던 백사장 건너편의 당군 진영에서 묘시(아침 8시경)가 되자 다시 대규모 도강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젠 강을 건너오는 규모가 1만 명도 넘어 보였다. 이들이 강을 건너 백사장 남쪽에 닿았다 싶었을 때 자소의 큰 아들 자수가 이끄는 결사대는 또다시 성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백사장에 이른 결사대는 바쁘게 움직이며 탁류를 헤치고 건너온 당군을 어렵지 않게 무찔러 나가는 듯 보였으나 강을 건너오는 당군의 수효가 점차 불어나자 싸움은 혼전의 양상을 띠어 갔다. 난군 속을 좌충우돌하며 가는 곳마다 당군을 쓰러뜨리는 장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자수였다. 범 아비에 범 새끼라고 자수의 무용은 오히려 자소가 젊었을 때보다 더 돋보였다. 자수의 칼이 번쩍 햇빛을 가를 때마다 당군들이 고꾸라졌다. 자수의 무용에 힘입어 그의 뒤를 따르는 욕이성 군사들도 용기백배하여 혼신의 힘으로 싸웠다. "와! 와!" 성루에서 이 광경을 바로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욕이성 백성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결사대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수의 무용도 한계에 이르렀다. 시간이 지나고 강을 건너온 당군의 숫자가 1만 명을 웃돌자 자수의 결사대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점 섬 같은 형국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다시 한 번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 곧이어 욕이성의 서문이 열리면서 한떼의 군마가 힘차게 백사장을 향해 내달았다. 주느부 소형 을불수가 선두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을불수는 백사장에 이르자 곧바로 자수의 결사대를 에워싸고 있는 당군에게 덤벼들었다. 당군 쪽으로 기울어 가던 전세가 금세 바뀌었다. 을불수의 부대 출현에 당황한 당군의 주력이 멈칫거리며 강 쪽으로 밀렸다. 싸움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또 한번의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고문간의 부대가 질풍처럼 나타났다. 이로써 당군의 두번째 도하 작전도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강 남쪽 백사장엔 당군의 시체로 뒤덮였고, 전의를 상실한 당군의 일부가 강을 건너 도망가려고 했지만 뒤쫓아온 욕이성 군사들에게 목숨을 일거나 급류에 휘말려 수장되고 말았다. 백사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1만 명이 넘는 당군의 피가 모래를 얼룩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당군은 두번째 도하 작전이 실패하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날은 종일토록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자소가 계획한 지연 작전의 하루가 무사히 지났다. 다음날 새벽, 당군은 또다시 살수의 도하를 시도하고 있었다. 자소가 전날과 같이 서문을 열고 보낸 결사대가 살수를 건너온 당군과 한창 어우러져 싸우고 있을 때였다. 문득 욕이성 뒷산에서 북소리가 났다. 둥 둥 둥 ... 자소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미명의 엷은 어둠 속에서도 욕이성 남쪽 산모퉁이를 돌아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일지군이 눈에 잡혔다. 어림잡아 5만 명이 넘어 보이는 대군이었다. 이때 우리쪽 성루에 있던 군사들은 만세를 불렀다. 남쪽에서 오는 것이 분명 펴라성에서 보낸 응원군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만세, 만세..." 자소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케르부 주부 대청군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자소 장군, 이젠 한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자수의 머리 속엔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급히 북치는 고수를 찾았다. "북을 쳐라! 회군의 북을 쳐라!" 그러나 이미 때는 한발 늦어 있었다. 자소의 예감대로 살수를 향해 달려가는 한 떼의 군마는 고구려군이 아니고 당군이었다. 전날 욕이성 결사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강을 건너지 못한 당군은 야밤을 틈타 강 상류 쪽으로 돌아가서 강을 건넌 다음 욕이성을 우회,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왔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하고 막리지 남건을 믿었던 한 가닥의 기대가 전쟁터에서 생사가 갈리는 몇 초를 허비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자소의 큰 아들 자수가 결사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후퇴하기에는 이미 한발 늦었다. 5만여 명의 당군은 삽시간에 고구려군 결사대를 에워쌌다. 드디어 결사대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다. 그때 욕이성 성루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느부 소형 을불수, 케르부 주부 대청군 등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새벽공기를 찢었다. "성문을 열어라!" "모두들 나를 따르라!" 동시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안 돼!" 자소였다. "안 된다구? 지금 우리 결사대가 죽어 나자빠지는데 안 된다니요?" "성문을 열고 나가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무겁게 내뱉는 자소의 말소리는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다. 자소의 기에 눌린 장수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리고 성루에서 두 눈을 치켜 뜨고 우리측 결사대 300명이 5만 명의 당군 속에서 한 사람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벌떼 같은 당군 속에서 칼을 휘두르며 무섭게 날뛰는 모습이 먼 빛으로 보아도 자수 같았으나 그것도 몇 분 뒤에는 사라져 버렸다. 욕이성의 결사대는 전멸한 것이다. 그날 따라 살수는 백사장에 널부러진 시신들의 처참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살을 철썩이며 유유히 흘렀다. 그러나 결사대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욕이성을 수비하고 있던 2천여 명의 병사들의 마음속에서 적개심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묵묵히 견뎌내는 자소 장군을 보고, 욕이성의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도 전의에 불타올랐다. 주느부 소형 을불수, 케르부 주부 온상덕, 대청군 등도 역시 연씨 정부에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일찍이 안시성 전투가 있던 제1차 고구려와 당나라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용맹한 장수들이었다. 그들도 자신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사대를 모조리 죽인 당군은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후 욕이성을 단숨에 삼켜 버릴 듯이 밀려들었다. 욕이성의 북쪽은 살수에 연해 있고 동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군은 비교적 지세가 낮은 성의 남쪽과 서쪽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성을 에워싼 당군은 10만 명이 넘는 병력, 욕이성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그때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는 당군 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자소! 자소 장군이 아니오?" 자소가 성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리치는 당나라 장수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다. "그대는 이세적!" 자소를 부르는 당나라 장수는 대총관 이세적, 자소가 안시성 싸움에서 맞상대하여 싸운 바로 그 이세적이었다. 훌륭한 장수끼리는 비록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세적은 여전히 기골이 장대했지만 그도 이미 80이 넘은 나이라 깊게 팬 주름살은 어쩔 수 없었다. "자소 장군, 뜻밖이오. 연씨 정권에 의해 축출당한 것으로 들었는데..."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건재하오." "살수 도하 작전이 거듭 실패한 것도 다 그대의 지모였구려. 적장이지만 그대를 늘 흠모해 왔소." "고맙소." 이세적은 자소를 연민의 눈길로 바라다보았다. "막리지 남건이 이미 도망친 것으로 아오. 내가 길을 열어줄 터이니 이 성을 얼른 빠져 나가시오." 자소가 이세적을 건너다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이세적 장군! 그따위 모욕적인 말은 당장 거두시오. 전쟁터에서는 오직 승자와 패자만 있는 법. 어서 공격이나 하시오." 당장 이세적은 끝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아깝군. 저런 장수가 우리 중원에서 태어났더라면..." 드디어 숨막히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당나라 군사들은 일시에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었다.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기어오르는 놈, 갈고리로 성벽을 찍으며 올라오는 놈, 성벽이 온통 당나라 군사들로 누더기처럼 뒤덮였다. 그러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욕이성이 차라리 규모가 적은 성이었기 때문에 수비가 용이했다. 북쪽과 동쪽이 모두 강물과 벼랑에 면해 있는 지형적인 이점 또한 다행이었다. 고작해야 2천여 명밖에 안 되는 고구려군은 서편과 남쪽 성벽 위에서 성벽을 타 넘어오는 당군을 창과 칼로 찔러 넘어뜨리기에 바빴다. 이처럼 혈전이 벌어진 가운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고구려군은 2천 명이 아니었다. 그 수효가 점점 불어나더니 1만 명도 더 넘게 되었다. 그날 아침에 결사대의 최후를 목격한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성루에 올라와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병을 낫이나 소스랑을 가지고 내려치고 있었다. 심지어 대 여섯 살 밖에 안되는 코흘리개들까지도 쉬지 않고 돌멩이나 끓는 물을 날랐다. 욕이성의 백성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결사적으로 항전하자 당군의 예상대로 쉽게 함락될 까닭이 없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 갈 무렵에야 당군은 무수히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두고 진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지연 작전의이틀째가 지나갔다. 그러나 자소는 큰아들 자수를 잃은 충격으로 저녁도 들지 않고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괴로워했다. 그날 밤 당군측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세적이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대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와 상대해 싸워 보기는 처음이오." 이세적의 말은 다시 전쟁 걱정으로 돌아갔다. "연씨 정부에 밉보여 쫓겨났다던 자소까지 다시 나타났으니 아무튼 성을 차지하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 같소. 무슨 좋은 수가 없겠소?" 부장 학처준이 나섰다. "자소가 요동이나 압록책 싸움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만일 그와 맞붙었더라면 우린 지금 이곳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소가 있는 욕이성을 그냥 비껴서 펴라성으로 직행해 버립시다." "옳습니다. 욕이성과 마주 싸운다면 수만 명의 우리 병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또 여러 날이 걸릴 것인즉,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고 옛날 살수와 안시성의 경우처럼 끔찍한 꼴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학처준의 말을 거들고 나선 것은 우상 유인궤였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대총관 이세적은 비로소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자소 같은 맹장이 우리 뒤를 따라와 후미를 습격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끝장이오." 그때 회의장 맨 끝에 있던 신라인 부장 김인문이 유창한 중국말로 끼어들었다. "욕이성에는 백성들까지 합쳐 1만 명이 넘을 듯싶은데 자세히 살펴보니 오늘 아침 연기나는 것이 시원찮았소." "그래서?" 뾰족한 묘책이 없어 답답하던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인문에게 쏠렸다. "내가 보기에는 필시 식량이 떨어진 듯하니 ... 시일을 조금 끌면 결판이 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제서야 당나라 여러 장수들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아닌게 아니라 욕이성엔 사실 식량이 없었다. 비축해 둔 식량은 막리지 남건이 요동벌과 압록책 싸움터에 가져다가 모조리 써버린 후였다. 물론 자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식량을 아끼고 성안에 있는 쥐나 뱀까지도 잡아먹으며 버틸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의 싸움은 자소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퍽이나 싱거웠다. 당군은 심심하면 가끔 일지대를 보내어 성을 공격하고 이쪽에서의 대항이 거세면 슬며시 물러났다. 또 4일째 되는 날의 전투도 그 전날과 비슷하게 끝났다. 싸움이 시들하게 되자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도 자연히 긴장이 풀어지며 배고픔이 몰려왔다. 배고픔을 참는 데도 한께가 있었다. 자소 역시 욕이성을 사수하는 것은 식량이 없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성한 지 5일째가 되는 날 밤, 드디어 철수를 결정했다. 그날 밤 삼경(밤 12시)에 소리 없이 욕이성의 남문이 열렸다. 먼저 1천 명의 욕이성 군사가 급히 성을 빠져나갔다. 주느부 소형 을불수가 선두에서 군사를 이끌었다.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만약 당군이 습격할 경우 고구려군은 욕이성 남쪽 5리 상거에 있는 성수산 협곡 쪽으로 내달려 협곡을 먼저 점령하고 뒤쫓아 들어오는 당군을 일격에 쳐부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측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군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 당군은 중군을 덮치자는 계획일까... 욕이성의 선봉대가 성수산에 도착할 시간쯤 되어 민간 백성들을 내보냈다. 만약 당군이 우리측 백성들을 습격하면 욕이성에 남아 있는 군사들과 성수산에 먼저 가 있는 군사들이 일시에 협공하여 당군을 포위하고 사살해 버린다는 전략이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야간 전추가 벌어지면 피아가 식별이 안 되므로 미리 삼끈으로 딱딱이를 만들어 소리를 내게 해서 아군끼리 서로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백성들의 행렬이 성수산 기슭에 다 이르도록 당군 진영에선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철수하는 고구려군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이젠 마지막으로 자소가 이끄는 1천여 명의부대가 성문을 빠져 나왔다. 역시 성수산에 이르도록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고구려 군측에서는 의아스러웠지만 당군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첫째는 캄캄한 밤중에 지형을 잘 아는 고구려군을 상대로 싸워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었고, 둘째는 피아의 식별이 잘 안 되어 혹시나 우군끼리 싸우는 일이 생기면 피해가 막심하고, 셋째는 자소와 같이 지략을 겸비한 맹장과 싸우다가 휼계에라도 걸려든다면 척후대 10만 명이 몰살해 버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소가 후퇴해 가는 곳은 펴라성 뿐인데 자소의 2천여 명 군사들이 펴라성으로 들어간다 한들 대국적인 면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아무튼 무사히 욕이성을 빠져 나온 자소 부대와 백성 1만여 명은 컴컴한 밤길을 날이 새도록 걸었다. 새벽녘에는 욕이성과 40리 떨어진 부리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먼지 보냈던 척후대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없습니다. 없어요." "아니, 무엇이 없단 말이냐?" "글쎄, 아무도 없다니까요." "뭐? 그러면 성이 텅 비었단 말이냐?" "예, 예, 그렇습니다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정말로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막리지 남건이 야밤을 틈타 욕이성을 빠져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욕이성으로부터 펴라성에 이르는 20여 개의 성안에 있던 장수들과 군졸들이 모조리 도망쳐 버린 것이다. 연개소문이 집권했던 25년 동안 고구려는 썩을 때로 썩어 그들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을 성주로 앉혀 놓은 결과, 정작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저 먼저 살겠다고 도망쳐 버리는 추태를 보였다. 일단 성안을 샅샅이 뒤져 보니 버리고 간 식량이 상당히 있었다. 우선 아침밥을 지어 이틀 동안이나 주렸던 군사와 백성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의 식량이 남아 있으므로 일반 백성들을 당분간 이곳에 머물도록 하고 군사들은 급히 펴라성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예상대로 부리성으로부터 펴라성에 이르는 길목의 모든 성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펴라성을 향해 철수하는 자소의 부대도 어느 성에 머물러 함께 수성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자소는 행군 속도를 빨리해서 펴라성을 향해 계속 내려갔다. 8일 후 자소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펴라성 근처에 다다랐다. 펴라성 동북쪽 40리 지점에 아리수를 끼고 마읍산이 있었다. 바로 이 마읍산은 펴라성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어 펴라성의 전초기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7년 전, 보장왕 20년 8월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쳐 들어와 이 마읍산을 빼앗고 펴라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예로부터 펴라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 마읍산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자소 부대가 이 마읍산을 거쳐 올때도 병졸 하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자소의입에서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마읍산은 펴라성의 머리와 같은 곳, 마읍산이 비었으니 이제 곧 펴라성도 비겠구나." 자소의 병사 2천 명으로 마읍산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소는 하는 수 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펴라성으로 입성해 버렸다. 자존심을 건 무예 대결 보장왕 27년(669). 한가위가 멀지 않은 8월로 접어들자 태양의 궤도가 점차 낮아져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여름내 들끓던 대지를 식히고, 연이은 흉년 끝에 모처럼 풍년이 들어 녹청색으로 빛나던 벼이삭들은 어느덧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해는 무서리가 일찍 내려 추수를 앞당겨야 했지만, 마읍산 앞 들에는 인적이 들물었다. 사내들이 전쟁터로 나가 집을 비우기도 하고, 남아 있던 백성들마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위의 적막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은 오직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 펴라성뿐이었다. 펴라성에서는 남건, 남산 형제가 상당히 많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전 국토가 모두 적군의 손에 떨어졌는데도 펴라성만 지키고 있으면 무사하다는 식이었다. 어쨌든 펴라성 안에 집결되어 있는 군사가 10만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나 군사들과 성중 백성들은 시시각각으로 조여 드는 당군의 위력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우왕자왕하는 꼴이 이미 법도 없고 질서도 없었다. 자소는 입성하기가 무섭게 막리지 남건을 찾아갔다. 남건은 자소의 얼굴을 보자마자 핏발선 눈을 굴리며 소리부터 질렀다. "자소! 왜 이리도 늦게 오는 거요?" "당군과 살수에서 싸우느라고 늦었습니다." "뭣이 당군과 싸웠다고? 군사도 없이 싸워?" "군사를 모집해 나흘 밤 닷새 낮 동안 당군 1만여 명을 베었습니다." 남건은 자소의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허 허! 촉나라 제갈공명이 환생했구려. 허기는 모든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헛소리인들 못할까..." 자소는 모욕감을 지그시 억눌렀다. 당장에라도 남건을 한칼에 찔러 죽이고 싶었지만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진중에서 차마 하극상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소는 절망감만 곱씹으며 막리지 접정실을 나왔다. 발걸음이 저절로 주느부 대인 안승강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불과 한 보름 사이에 얼굴이 몰라 보게 초췌해 있었다. 안승강의 말에 의하면 사신을 왜국에 보내지도 않았고, 당군의 수송로를 끊기 위해 군사를 요동 반도에 상륙시키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젠 펴라성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이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펴라성은 고구려의 수도인만큼 가장 큰 성이었다. 한쪽의 길이만도 10리에 달하고 성책의 높이는 여섯 길이나 되어 아무도 감히 깨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거기다가 성의 남쪽은 아리수(대동강)가 흘러 적군이 감히 공격해 올 수 없고 또 동쪽과 북쪽도 높은 산의 능선을 타고 성을 쌓아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그러나 외부와 모든 연결이 차단되어 완전히 고립무워해진 펴라성은 싸울 때까지 싸우다가 전원 옥쇄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자소가 펴라성에 입성한 다음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전쟁은 톱니바퀴처럼 한 시각의 지체도 없이 앞으로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발마가 급히 달려와 당군의 선봉대가 벌써 마읍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때 당군 총사령관 이세적은 마읍산의 험한 골짜기의 벼랑길을 통과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컬컬 웃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천험의 지형인데도 개미새끼 한 마라 없다니!" 8월 초사흗날.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날 오시(낮 12시)가 조금 지나 마읍산을 거쳐 펴라성을 향해 오는 당군의 행렬이 보였다. 창검과 기치가 숲을 이루고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펴라성에 제일 먼저 당도한 것은 당장 설필하력의 부대였다. 설필하력의 부대는 바로 평지로 연결되어 있는 펴라성 서문 밖5리 지점에 진을 쳤다. 그리고 다음 부대의 도착을 가다리는 눈치였다. 그날 미시(오후3시)가 조금 지나서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군의 주력 부대가 도착했고 다음으로 유시(오후6시)경에 김인문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도착했다. 당군의 총병력은 어림으로도 60만이 넣었다. 펴라성을 포위한 상태로 이틀을 쉰 당군의 총공격은 8월 초닷새부터 시작되었다. 펴라성 동쪽은 김인문의 신라군이, 북쪽은 이세적의 중군이 그리고 서쪽은 설필하력군이 담당했다. 고구려군도 수성을 휘해 각 편대를 만들었는데 막리지 남건은 워낙 다급해지니까 자소에게 3만 명을 주어 당군의 주공격 목표가 되리라고 예상되는 펴라성 서쪽을 맡겼다. 그리고 고문간과 을불수가 북쪽, 대청군과 온상덕이 동쪽을 맡겼다. 27년 동안 연씨 정부에 빌붙어 사치하고 호화롭게 살던 자들은 하나같이 꼬리를 감추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자 당군은 60만이라는 미증유의 대군을 동원하여 펴라성을 공격해 왔다. 대군의 행동은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공룡이 육중하게 꿈틀대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 40여만 명의 설필하력 대부대는 북을 치며 평탄한 지세인 펴라성 서쪽으로 한반짝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는 펴라성 성벽 위의 궁노수는 1만여 명. 두 줄로 서서 성을 향해 개미떼같이 다가오는 당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엄청난 전투를 예고하는 듯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당군과 성벽의 거리는 200보, 15보... 전투 개시 전의 팽팽한 긴장이 순간 순간 거리를 좁혀 왔다. 드디어 100보. 그때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쏘아라!" 동시에 성벽 위에서 전방을 노려보고 있던 공노수 1열이 화살을 날렸다. 앞장서서 다려오던 많은 수의 당병들이 화살을 맞고 푹 꼬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화살을 쏘고 난 1열이 어느새 무릎을 꿇고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화시위에 먹이는 동안 뒤에서 있던 제2열이 당군을 겨냥했다. "쏘아라!" 1열이 쏘고 나면 2열이 쏘고, 2열이 이어서 또 1열이 쏘고 이렇듯 쉴 사이 없이 날아드는 화살 세례에 노도같이 달려들던 당군의 선봉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했다. 당군들은 일시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밭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군으로서는 그때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궁노수들이 제멋대로 화살을 쏘아 아무리 화살이 비오듯 해도 뚫고 나갈 틈새가 있었다. 그런데 펴라성 위에서 궁노수들이 일렬로 서서 똑바로 앞만 보고 화살을 쏘아 대자 화살과 화살 사이의 틈바구니가 없는데다가 또 여유를 주지 않고 1열과 2열이 교대로 화살을 쏘아 대기 때문에 당군은 성벽에 접근도 못해 보고 결국 뒤로 물러섰다. 이 화살 전법은 자소가 고안해서 처음 사용해 본 것인데 의외로 위력이 있었다. 이날 당군은 꼼짝없이 2만여 명의 병사들을 잃었다. 이와 같이 당군의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음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성격의 당장 설필하력과 그의 부장들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뒤에서 연방 채찍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는 당병들을 후려쳐 앞으로만 나아가게 했기 때문에 성책 가까이 내몰린 당병들은 궁노수들의 화살을 맞고 무수히 쓰러졌던 것이다. 당군은 수효가 많은 것만을 ㅁ고 계속 밀어붙였으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날 오시(낮 12시)가 지나서 군대를 물려 버리고 말았다. 자소가 지키는 펴라성 서쪽 못지 않게 참패를 당한 곳은 펴라성 동쪽을 공격한 신라군이었다. 신라군은 당군의 뒤를 따라다니며 계속 승리한 것에 자만하고 있었다. 줄도망만 치는 고구려군을 아예 업신여기는 마음까지 생겼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군도 수백 년 동안 신라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어 신라군을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고래가 뛰면 망둥이도 따라 뛴다고 당군이 압록책으로부터 펴라성에 이르기까지 연전연승하자 당군의 부장 직함을 받아 신라군 3만을 이끌고 참전한 김인문은 펴라성 동쪽의 가파른 언덕을 군사들을 독려하며 올라갔다. 펴라성 동쪽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장수는 대청군과 온상덕, 그들은 소년 시절에 안시성 전역에서 용맹을 날렸던 만만치 않은 장수들이었다. 특히 온상덕은 평원왕 때 유명한 온달 장군의 증손자였다. 대뜸 온상덕이 큰소리로 김인문을 꾸짖었다. "김인문! 넌 어쩌자고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못살게 구는냐?" 김인문도 질세라 되받았다. "당나라는 우리 부모의 나라다. 너 같은 고구려 오랑캐는 이제 끝장이다." "네가 정녕 환장을 했구나. 네 이놈! 그러고도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이놈 봐라! 어디다 대고 큰소리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그래 네가 범이나? 에잇! 이 똥강아지야. 중국놈 똥이나 먹고 살아라." 온상덕은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떠한 경우도 성문을 열지 말라는 막리지 남건의 명령도 무시한 채 성문을 아예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담숨에 군사들을 몰고 성문 밖으로 뛰어나가 신라군을 덮쳤다. 그러지 않아도 신라 병사들은 산비탈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판이었는데 산악전에 능숙한 고구려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자 피아간에 창칼 몇 번 주고받지도 못하고 밀리고 말았다. 밀려 내려가는 신라군을 쫓아 내려가는 고구려군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아침 초전에 신라군은 2만 명의 군사를 순식간에 잃고 재기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다. 펴라성 북쪽을 공격한 중군 이세적도 서쪽과 동쪽에서 당군과 신라군의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찌감치 군사를 거둬들였다. 그래도 서쪽의 설필하력과 동쪽의 김인문군에 비해 사상자가 가장 적은 편이었다. 이세적은 하는 수 없이 부장 설인귀에게 따로 5만 명을 주어 김인문 대신 펴라성의 동쪽을 맡겼다. 펴라성 전투 첫날은 당군측이 사상자 5만 명이 넘는 대참패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다음날은 종일토록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래도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공격이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비가 내린 뒤끝이라 그날 저녁부터는 날씨가 눈에 띄게 차졌다. 3일째 되던 날은 비가 그치고 날씨가 청명했다. 이른 새벽, 성루에 있던 고구려군이 바라다보니 당군 진영에서 이상한 물체가 굴러 오고 있었다. 지붕과 벽은 판자로 씌우고 그 밑에는 나무 바퀴 4개를 달았는데 그 안에다 군사들을 가득 싣고 뒤에서 밀고 오는 것이었다. 성책 위에 있는 군사들은 처음 보는 병기를 보고 놀랐다. '저것이 뭘까?" 병사들이 겁을 먹고 바라다보고만 있을 때, 자소는 성을 햐애 굴러 오는 물체가 무엇인가 금방 알아차렸다. 목제 장갑차였다. 전일처럼 궁노수를 배치해서 화살을 퍼부어 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살은 목제 장갑차를 둘러싼 나무판자에 맞고 땅에 떨어졌다. 자소는 즉시 전 장병들에게 수성 준비를 시켰다. 활 대신 갈고리, 창, 칼, 도끼 등을 휴대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사람을 보내 포차를 만들어 끌고 오도록 했다. 그사이 성벽 밑에 도달한 당군의 장갑차에서는 군사들이 꾸역꾸역 기어나오더니 일시에 성엽을 타오르기 시작하고, 이어서 피비린내나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기어오르면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창으로 찌르고 도끼로 머리통을 까부셨지만 그래도 당군이 계속해서 기어올랐다. 당군은 처음부터 사람 죽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인해전술로 나왔다. 당군이 반복해서 성을 기어오르자 성책 위에 있는 고구려군도 어지간히 지쳐 버렸다. 싸움은 오시가 지나 미시(오후 2시)가 넘도록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었다. 펴라성 성벽을 따라 자욱하게 먼지가 일고, 양편 군사들이 뒤엉켜 소리를 지르고, 창칼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자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심 불안했다. 병력이 워낙 적으니 교대병이 없어 병사들이 그때까지 점심을 거르고 있었다. '이를 어떡한다?' 자소가 걱정에 싸여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소 대장님!" 자소가 급히 돌아다보니 성의 서북쪽이 위험에 빠져 있었다. 당군들이 우리측 병사들을 밀어젖히고 성벽을 타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배치되어 있는 우리측 병사들이 모두 보상했거나 전사한 것이었다. 자소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들 자영을 찾았다. "자영아!" "예, 아버지." 다행히 자영이 곁에 있었다. "즉시 저쪽으로 가서 당군을 막아라!" 자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소의 둘째 아들 자영이 군사를 이끌고 성의 서북쪽으로 뛰어가 성벽을 기어오른 당군과 일대 혼전을 치른 후 간시히 뚫린 구멍을 막을 수 있었다. 참으로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자소가 주문한 포차 20여 대가 당도했다. 포차에 한아름이 넘는 돌을 재어 성밖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바윗돌이 날아가 당군을 성 밑까지 실어나르는 장갑차 지붕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윗돌에 맞은 장갑차는 지붕이 폭삭 내려앉고 그 안에 타고 있던 당군들의 머리와 뼈가 으깨지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장갑차뿐만이 아니었다. 바윗돌은 한참 공격중이던 당군의 머리위에도 무수히 떨어져다. 포차가 등장하고서부터는 당군의 사나운 공격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소는 이때다 싶어 다시 명령을 내렸다. "모두 활 쏘는 대형으로." 성책 위의 고구려 병사들은 칼과 창을 거머쥐었던 손에 대신 활을 바꾸어 잡고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뒤처져 있는 당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댔다. 당구노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었다. 펴라성의 두번째 전투도 고구려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날 죽은 당군이 3만, 우리측도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8월 11일에 당군의 3차 공격이 있었다. 당군은 충차와 운제를 동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케케묵은 발상, 지난날 안시성 전추에서 당태종이 사용했다가 모두 실패했던 전법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싸움도 아닌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는 이미 통하지 않는 구식무기들이었다. 자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화살을 날려 운제를 불지르고,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아 충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요절을 냈다. 펴라성 북쪽의 이세적의 중군도 맹공으로 나왔지만 을불수가 결단을 내버렸다. 그날 죽은 당군의 수가 4만 명에 가까웠다. 당군이 불과 7일 동안 싸움에서 이렇다 할 전과 없이 1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자 모두 침통했다. 그날 밤 당군 진영에서는 밤이 이슥하도록 장수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대총관 이세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공성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날씨는 추워지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설필하력, 설인귀, 유이궤, 학처준, 백안륙, 방동선 등 당나라의 쟁쟁한 장수들도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유인궤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펴라성만 남겨 두고 고구려의 전 국토를 쓸어버립시다." "안 될 소리! 뿌리가 살아있으면 언제든지 싹이 나고 가지를 뻗는 법. 우리는 멀리 떨어져 고구려를 장기간 누를 힘이 없소." 대총관다운 이세적의 대답이었다. 그때 김인문이 이세적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는 며칠 전에 대참패를 당한 터라 어떻게든 체면을 세우고 싶었다. "대총관 각하! 제 의견으로는 야습을 하는 것이..." "야습?" "그러하옵니다. 불시에 야습을 하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고구려군을 일격에 깨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세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이어서 그의 입이 열렸다. "흐흠! 괜찮은 발상이오." 이세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인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한 가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요즈음 달이 밝은 때라..." "좋소, 군량이 넉넉하니 기다립시다. 다들 이견은 없소?" "..." 전쟁터에서만 거칠게 살아온 장수들인지라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습 날짜는 그믐께로 정해졌다. 그 동안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따로 사자를 본국으로 보내어 당고종에게 전쟁의 진행 상황도 보고할 겸 다른 계책을 구하기로 했다. 그 다음날부터는 소규모의 싸움 이외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전투가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펴라성의 분위기도 묘하게 변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한가롭게 보였으나 수십만명의 군사들이 5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중동이라고 할 수밖엔 없었다. 언제 휴화산이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의 정적이 계속되고 있었다. '왜 당군은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일까?' 전쟁터에서 한평생을 보낸 자소로서도 당군의 속셈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군 입장에서 보면 이제 우리 속에 가두어 놓다시피한 호랑이를 다시 풀어 놓아줄 까닭도 없고, 그렇다고 8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부족해 증원군을 요청했을 까닭도 없었다. 펴라성내에서 고구려의 마지막 목숨이 스스로 붕괴되어 소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탈출구도 없는 상황에서 소강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펴라성측에서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첫째로 군량을 생각해 볼 때 성안에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 보장왕과 일반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남건, 남산 형제의 집권 체제하에서는 언제 자중지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어서 차라리 속전속결로 이 전쟁을 끝장내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고구려 쪽이 더 절실했다. 그래서 자소도 어떻게든지 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갑갑한 형국을 개야만 한다고 생각하고그 묘안을 궁리 중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난 여드레 동안이나 펴라성 백성들과 군사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던 침묵이 당군에 의해서 먼저 깨졌다. 쉿-. 난데없이 당군측에서 화살이 날아오더니 펴라성 서문 누각 나무기둥에 박혔다. 그 화살 끝에는 종이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군사 하나가 화살을 빼들고 급히 자소 장군에게 뛰어갔다. 당군대장 이세적의 글이 적혀 있었다. 고구려군 자소 장군 각하 귀하의 수성은 참으로 훌륭하오. 우리 당군이 귀국을 침범한 것은 선왕(영양왕)을 사사로이 죽이고, 임금(보장왕)을 핍박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못살게 만든 연씨 일족을 벌주기 위함이지 그 이외의 다른 의도는 조금도 없소. 우리는 귀측이 대당과의 자손만대 우호를 생각하여 우리측의 요구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기 바라며 기다리고 있소. 그리고 연일의 대접전은 무수한 생명만이 소진되어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짓. 차라리 귀측의 장수들과 무예를 견주어봄이 어떻겠소. 동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제안하겠소. 일시 : 8월 20일 진시(아침 9시경) 장소 : 펴라성 서문 밖 들 장수 : 각 5명 방법 : 단기전 대당 대총관 이세적 이세적의 편지에는 연씨 일족들만 제거하면, 화해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씨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펴라성측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무예 시합만은 수락하기로 결정이 났다. 모두들 외부와 차단된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보니 무슨 일이든지 변화가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고, 자소 또한 당군측의 제안을 거부하면 이쪽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막리지 남건, 대대로 남산 형제에게 적극 응할 것을 권유했다. 다음날 아침, 예의 화살 한 대가 펴라성벽 위에서 당군 진영으로 날아갔다. 당 이세적 장군 귀하 사이좋게 지내야 할 이웃간에 생트집을 잡아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는 것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요, 밑으로는 백성들을 못살게 하는 짓이오. 따라서 우리 고구려는 귀측에서 즉시 군대를 철수해 옛날의 우의가 조속히 회복되기를 바라오. 다음, 귀하가 제안한 무예 시합은 기꺼이 동의하오. 당일 좋은 상면이 있기를 바라겠소. 고구려군 대장 자소 8월 20일.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따금 소슬바람이 불어와 누렇게 시들어 가는 들풀을 뉘곤 했다. 고구려군과 대치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도 이날만은 전쟁의 긴장감을 떨쳐 버리고 운동회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고구려군 5만은 서문을 열고 나와 성벽을 등지고 도열하고, 맞은편의 당나라군은 성벽을 1천 보쯤 떨어진 곳에 펴라성의 수성군을 마주보며 몇 겹으로 둘러서서 관전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진시(오전 9시)가 조금 못 되어 보장왕 이하 막리지 남건, 대로 연개수오, 고사지, 안승강 등이 성에서 나와 미리서 준비한 차일 안에서 들어와 좌정을 했다. 당군측에서도 대열 중앙에 모든 장수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는지 장막 주변에는 청, 홍, 황색의 장군기가 무수히 나부끼고 있었다. 둥 둥 둥 진시에 이르자 어느 편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북소리가 들려 왔다. 북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고구려 진영에서 오추마를 탄 한 장수가 양군의 중간 지점을 향해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의 은빛 투구와 갑옷 그리고 오른손에 단단히 꼬나쥔 장창의 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을 내며 눈이 부셨다. 보아하니 고구려의 첫번째 장수는 소형 을불수였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의 직손으로 키가 9척이요, 또 얼굴빛은 대추처럼 붉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붙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용모 못지 않게 성질도 곧고 불같아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노호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한편 당군측에서도 먼지를 날리며 역시 오추마 한 필이 달려 오고 있었다. 장검을 거머쥐고 을불수를 마주보며 사납게 달려오는 장수는 뜻밖에도 신라인이었다. 김인문의 아장으로 이 싸움에 참견하고 있는 신라국 아솔 벼슬에 있는 흥원이라는 장수. 일찍이 화랑도에서 선화로 무리를 이끌어 소년 시절부터 그의 출중한 무예 솜씨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흥원의 나이는 이제 갓 20이 넘었을까. 검은 얼굴에 보드라운 구레나룻이 성글게 덮여 있어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측에서는 전쟁이 고구려 땅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만큼 신라의 대리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첫번째로 신라인을 내세웠던 것이다. "네 이놈! 어린 나이에 오랑캐놈 앞잡이가 웬말이냐?" 을불수가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자 흥원도 이에 지지 않고 맞받았다. "늙은 놈이 어디에다 대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잔말 말고 신라의 화랑이 어떤가 맛이나 보고 돌아가거라." 두 사람의 험한 욕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마리의 오추마가 서로 엉켜 붙는가 싶더니, 쨍! 하고 장창과 장검이 맞부딪치는 금속성을 내며 첫합이 지나갔다. 멀리서 보아도 두 장수가 달리는 말 위에 안자 엉켰다 떨어졌다. 하면서 창칼을 쓰는 솜씨는 조금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을불수가 흥원의 말 뒤를 돌아 허점을 노려 흥원의 옆구리를 찌르자 어느새 흥원의 장검이 장창을 내리치고 창날이 허공으로 튕겨지는 찰나를 틈타 장검으로 을불수의 멀리를 후려쳤다. 장검의 칼날이 하마터면 을불수의 머리통을 두동강내 버릴 아슬아슬한 순간,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을불수의 장창이 흥원의 예리한 칼날을 막았다. 싸움은 벌써 10합, 20합에 이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양편으로 늘어선 군사들이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했으나, 두 장수의 싸움이 한치의 빈큼도 없이 진행되는데다가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치 않는 절대절명의 양상을 띠자 모두들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며 두 장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두 장수의 무예 솜씨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20만이 넣는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였건만 마치 시간이 정치해 버린 것같이 조용했다. 오로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두 장수가 탄 말고 장창과 칼뿐이었다. 이윽고 40합이 넘어서자 두 장수도 차츰 지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역시 젊은 신라 장수 흥원이 경륜에서는 을불수에게 한수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싸움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흥원의 허점이 더 노출되고 을불수의 장창이 흥원의 허점을 어김없이 찾아 찌르자 싸움은 자연히 을불수의 공격에 흥원이 수세를 취하는 양상으로 변해 갔다. 누가 보아도 흥원 쪽이 열세였다. 이때 당군 쪽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 북소리에 맞춰 두뻔째의 장수가 당나라 진영에서 뛰쳐나왔다. 당나라 장수는 철륵의 시막가가한의 손자 위구르인 설필하력. 출생이 서역인이라 얼굴이 붉고 곱슬한 머리털이 이마 위까지 덮여 있어 그의 용모는 성난 불곰을 연상시켰다. 9척 장신에 걸맞게 체격도 우람하여 타고 나온 적토마가 왜소하게 보일 정도였다. 당군측에서는 애초에 두번째 장수로 당요동도순검사 장소를 출전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신라 장수 흥원이 초전에 패하지 갑자기 예정을 바꾸어 무예가 장소보다 한급 위인 맹장 설필하력을 내보냈다. 설필하력이 날이 커다란 도끼자루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 하도 기괴해서 바라보는 고구려 군사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소가 급히 장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남건에게 건의 했다. "우리도 대적하는 장수를 바꾸어야 합니다." "장수를 바꾼다고?" "그렇습니다. 대형 연개수오는 설필하력의 적수로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럼 누구로 바꾼단 말이오?" "저나 그렇지 않으면 고문간을 출전하게 해주십시오." 고문간은 어렸을 때부터 이름난 장수였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화도 있었다. 어느날 사냥을 가서 풀 속의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보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명중하여 쫓아가 보았더니 왠걸 호랑이가 아니고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노란 고문간은 다시 화살을 매겨 바위 뚫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고문간은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문만 있으면 쫓아가서 호랑이를 꼭 잡아 죽였다. 간혹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호랑이를 죽일 때까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살호장군이라 부르고 그의 무용을 자소, 대청군, 온상덕, 을불수와 더불어 첫번째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런 숨가쁜 전쟁 마당에서까지 연씨 정부는 족벌의 사슬을 끊지 못했다. 연개수오는 막리지 남건의 산촌동생으로, 그간 연씨의 독재 정부를 무력으로 떠받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직 30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무예로는 고구려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나 자소의 판단으로는 설필하력의 적수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러나 남건의 생각은 자소와 달랐다. "고문간? 그는 이제 늙었소." "아닙니다. 설필하력을 이길 수 있는 대장은 고문간밖에 없습니다." "어허! 뭘 잘못 안 게 아니오? 내 보기에는 연개수오 정도면 설필하력쯤은 낭중취물 다루듯이 할 테니 두고 보시오." ".." 결국 연개수오가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기다리고 있는 설필하력을 향해 달려나갔다. 고구려 군중에서는 첫번째 대결에서 승리한지라 가뜩이나 분위기가 고조되어 징, 꽹과리, 북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함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고구려 만세!" "연 장군 이겨라." "똥되놈 죽여라." 이윽고 설필하력의 도끼와 연개수오의 언월도가 맞부딪치며 번쩍 불꽃을 튀겼다. 그런데 이쪽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응원에 열을 올리자 한 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당군 진영에서도 질세라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펴라성 서문밖 들은 늦가을 소슬한 날씨인데도 양쪽 진영에서 발산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사이 설필하력과 연개수오가 10여 합을 주고 받았다. 붉은 곱슬머리의 설필하력이 흡사 한 마리의 맹수처럼 도끼를 휘두르며 연개수오 쪽으로 돌진해 오면 연개수오는 잽싸게 말잔등에 엎드려 도끼날을 피한 후 어느새 언월도를 설필하력의 두 눈을 향해 내지른다. 연개수오의 언월도에 하마터면 얼굴을 날린 뻔한 설필하력은 그만 분기가 탱천했다. 불곰 같은 얼굴이 더욱 시뻘개져서 무시무시한 도끼날을 좌우로 번개처럼 휘두르자 연개수오는 미처 언월도를 똑바로 꼬나잡을 여유가 없었다. 설필하력의 서슬에 눌려 연개수오가 언월도를 떨어뜨리며 뒷걸음질쳤다. 그때였다. "얍!" 설필하력의 도끼가 연개수오의 정수리를 똑바로 내리찍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몸을 날려 용케도 도끼날을 피한 연개수오가 다급한 나머지 엉겁결에 왼손으로 설필하력의 도끼목을 잡았다. 곧이어 도끼자루를 쥔 설필하력과 도끼목을 두 손으로 거머쥔 연개수오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설필하력이 도끼자루를 놓치면 연개수오가 빼앗은 도끼로 설필하력을 찍을 것이고 반대로 연개수오가 놓치면 설필하력이 무방비 상태가 된 연개수오를 박살내 버릴 형세가 되었다. 갑자기 돌변한 상황을 양쪽 군사들이 숨을 죽여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연개수오의 무예는 설필하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힘은 엇비슷했다. 두 장수 간에 도끼자루를 사이에 두고 사력을 다한 힘 겨루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둥 둥 둥. 고구려 진영에서 난데없이 북이 울렸다. 그리고 북소리가 그친 다음에도 힘 겨루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설필하력이 이길 것으로 기대했던 당군측에서는 미련이 남았던지 시간이 더 흘러서야 북을 쳤다. 둥 둥 둥. 두번째 대결은 결국 양군의 무승부로 끝났다. 그런데 세번째의 대결은 첫번째와 두번째와는 달리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결말이 났다. 당군측에서는 만부부당지용을 가졌다는 백전백승의 거기장군 발해도 부대 총관 장손무기가 나오고 고구려군측에서는 대대로이며 남산의 처남인 대인 고산수가 나왔다. 장손무기가 80근이나 되는 유성추를 머리 위에서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리며 고산수에게 덤벼들었다. "얍-" 내지르는 장손무기의 고함소리는 마른 하늘에서 번개치듯 온 땅을 뒤흔들었다. 이에 화답이나 하듯 쌍고검을 춤추듯 휘두르며 달려든 고산수도 맞고함을 질렀다. "으랏차-." 그런데 고산수가 지른 기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불꽃이 번쩍 튀더니 뒤이어 쨍그렁하며 유성추와 쌍고검이 맞부딪쳤다. 병사들은 뒤이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금방 알아챘다. 어이없게도 고산수가 양손에 쥐고 있던 쌍고검이 유성추에 맞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쌍고검을 단 1합에 잃어버린 대인 고산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고구려군 진영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소년 시절부터 당태종을 따라다니며 살벌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손무기가 도망치는 고산수를 가만히 놓아 보낼 까닭이 없었다. "냉큼 모가지를 두고 가거라." 양발로 적토마의 엉덩짝을 힘껏 박차더니 금방 고산수의 뒤를 쫓았다. 장막 안에 있던 보장와 이하 남건, 남산 형제 등과 고구려쪽 군사들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절대절명의 위급한 순간이었다. 유성추를 돌리며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장손무기가 그대로들이닥쳐 고구려 군신들이 있는 장막을 덮치면 큰일이었다. 자소도 장창을 꼬나 잡고 여차하면 고산수를 바짝 뒤쫓아오는 장손무기를 막아서려고 튀어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군영 앞 50여 보까지 고산수를 뒤쫓던 장손무기는 혼자서는 5만 명의 대병을 어찌할 수 없었는지 급히 말고삐를 당겨 멈추더니 오던 길을 뒤돌아갔다. 그때 고구려 진영에서는 또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되돌아가는 장손무기가 거진 양군의 중간지점을 넘어서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고구려 장수 하나가 장손무기를 추격이나 하는 것처럼 고함을 지르며 튀어나가는 것이었다. 자소가 놀라서 보니 당군 진영을 향해 장검을 빼어들고 달려가는 장수는 어처구니없게도 신성싸움에서 목숨만 건져 쫓겨온 대인 고혜상이 아닌가. 예정대로라면 고구려군의 네번째 출전자는 자소와 함께 욕이성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케르부 소형 온상덕이었다. 대인 고혜상은 사람 됨됨이가 가볍고 경솔하고 무능한데도 연씨 정부에 갖은 아첨을 다하여 신성 태수가 되었다. 고혜상은 개전 초기에 신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일시에 잃어버리고 난 다음 펴라성으로 돌아와서도 남건과 남산 형제에 빌붙어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나는 꼴이 하도 눈꼴사나워 고구려 사람이면 그를 미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쨌든 고혜상은 장손무기가 자기 진영을 해야 거의 되돌아갔는데도 마치 그를 추격이나 하는 양 출진했으니 고구려군측의 네번째 장수는 어쩔 수 없이 온상덕 대신 고혜상이 된 셈이다. 이때 장순무기의 완전한 승리에 사기가 오른 당군측에서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이어서 붉은 전포를 입은 일원대장 당군의 진문을 나섰다. 그는 다름아닌 요동도행군대총관 부장 학처준이었다. 학처준은 비범한 무예를 가진 장수였다. 일찍이 당태종을 따라 돌궐을 정벌하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당태종이 열하수에서 복병을 만나 군사가 거의 전멸하고 당태종의 운명도 끝나는가 했다. 그때 학처준이 단기로 당태종을 호위하며 혈로를 뚫고 열하수를 건너게 해, 후일 돌궐을 정복케 하고 돌궐왕 힐리를 사로잡은 당나라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고혜상은 도저히 학처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싸움이 맞붙어 두어 합이나 지났을까 벌써 고혜상의 칼놀림이 어지러워지더니 미처 5합도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승패는 눈깜짝할 사이에 뒤바뀌어 1승 2패 1무로 고구려군측이 당군에 뒤지고 있었다. 당군측이 미친 듯이 북을 치며 고함을 질러 대는데도 고구려군은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고구려군 출진자는 대형 자소였다. 비록 자소는 직함이 대형에 불과했으나 펴라성의 수성전에 주역을 맡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고구려군의 총대장격이었다. 고구려군측에서총대장 자소가 나왔으면 당군측에서도 당연히 이번 싸움의 당나라군 총대장인 요동도행군대총관겸 안무대사 이세적이 나와야 했으나, 이세적의 나이는 이미 80이 넘어 실전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 있었다. 이세적을 대신해서 당군의 대표로 출진한 장수는 당군의 최고 명장으로 알려진 설인귀였다. 강주 용문인 설인귀는 어렸을 때부터 한 말 밥을 먹고 황소를 번쩍 들어올린 소년 장사로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장성하여 당태종을 따라다닌 후에도 매년 정월이면 열리는 무술 시합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어 일찍이 단상에서 이를 지켜본 당태종마저도 절로 감탄했다. "어허! 설 장군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무용을 지녔구려." 당태종의 극찬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옛날 항우나 여포더 설 장군을 만나면 무서워 도망가겠소." 그의 신기에 가까운 무용에 당태종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아무튼 마지막 대결에 양군의 총대장간의 싸움인지라 한층 무게가 얹혀져 마치 싸움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서 양군 총대장의 출진은 잠시 동안 뜸을 들였다. 이윽고 양군 진영에서 마지막 장수들의 출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둥 둥 둥. 벌써 가을 해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높은 중천에 떠 있었다. "가므여 나흐 도웨요." 말잔등에 올라탄 자소는 장창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고는 양군의 중간지대를 향해 천천히 달려갔다. 등뒤에서는 고구려군의 응원하는 함성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지만 자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나이 갓 스물에 참전한 안시성 싸움으로부터 펴라성 전투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싸움을 여러 번 거쳤고 그때마다 이미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싸움만큼은 여느 때의 싸움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전의 대결이 불확실성 위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난전중에 싸웠다면 이번 싸움은 수십만의 눈초리들이 비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소 혼자만이 정정당당히 한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더욱이나 나라의 명예를 건 일국의 대표가 아닌가. 이제 고구려는 마지막까지 밀려 독 안에 갇힌 쥐꼴이 되어 있고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한평생 나라에 몸바쳐 살아온 자소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짓기 위해서도 이 싸움만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 당군 진영에서는 신장이 9척이요 얼굴이 흙같이 검은 설인귀가 장검을 빼어들고 이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당장 설인귀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깊었길래 생사를 걸고 또 싸워야만 하는가. 자소는 안시성의 토산 싸움에서도 설인귀와 대적했었다. 자소는 가까이 다가오는 설인귀를 향해 무인답게 무례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람을 끊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자소는 재빨리 마상에 엎드렸다. 설인귀의 칼이 자소의 머리털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바로 자소의 목례에 대한 당장 설인귀의 첫인사였던 것이다. 자기가 살아 남기 위해 오직 상대편을 죽이는 일만이 있는 전쟁터에서는 털끝만한 방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설인귀가 탄 적토마는 다시 한바퀴 원을 그리더니 쏜살같이 자소를 향해 돌진해 왔다. 쨍그렁! 이어서 칼과 장창날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공기중에 파장처럼 퍼져 나갔다. 두 마리의 말이 다시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싸움은 점차 가열되기 시작했다. 싸움은 10합, 20합을 넘어섰다. 자소의 장창 쓰는 솜씨는 이미 달인의 경지를 넘어섰지만 설인귀의 칼솜씨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 신기에 가까웠다. 칼을 휘두르는 것도 칼날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드는 절묘함이었다. 대개 전쟁터의 싸움에서 상대편에게 허점을 보이는 것은 말을 잚소 몰라 상대방에게 등을 보였을 때, 그리고 칼로 내려치거나 창으로 상대방을 헛찌르고 난 다음 자기의 몸이 상대방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찰나에 있다. 이 찰나가 삶과 죽음을 갈라놓았다. 그러나 자소나 설인귀와 같은 고수의 싸움에서는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생사를 결정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설인귀의 칼쓰는 솜씨는 도통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신묘했다. 칼로 내려쳤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장창으로 맞받으면 칼은 판단했던 순간보다 빠르거나 늦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연이은 동작으로 자소의 허점을 찔러 왔다. 두 장수의 싸움은 어느 모로 보나 백중지세였다. 오히려 설인귀 쪽이 다소 우세한 가운데 50합이 넘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50합을 넘어서면서 그때까지 잘 싸우고 있던 자소는 뜻밖에도 목숨을 빼앗길 뻔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설인귀의 말과 자소의 말이 달려온 힘에 의해 서로등을 보이며 다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갑자기 설인귀가 마상에서 몸을 돌리며 자소의 등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휙-. 등뒤에서 메마른 공기를 끊는 금속성이 나자 자소가 본능적으로 몸을 굽혔지만 비수는 자소의 겨들랑이 밑을 뚫었다. 자소의 몸에서는 금방 붉은 피가 새어 나와 청색전포를 물들였다. 그러나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말머리를 돌릴 자소가 아니었다. 이미 피를 본 자소는 죽기를 다해 더욱 격렬하게 싸웠다. 두 장수의 싸움은 100합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싸움이 조금만 더 계속된다면 필시 두 장수 중 한 장수가 목숨을 잃으리라.. 이때 난데없는 북소리가 들려 왔다. 둥 둥 둥. 당군 진영에서 신인귀의 회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고서야 두 장수의 싸움은 끝나고 제각기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쳐 있는 말을 바꾸어 타기 위한 잠정적인 휴전이었지 싸움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윽고 새 말로 바꾸어 탄 두 장수가 다시 나와 맞붙었다. 설인귀로서도 자소와 같은 호적수는 일생 처음이었고 자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음흉한 당나라측에서는 설인귀가 쉽사리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간특한 계교를 생각해 냈다. 싸움이 다시 20여 합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설인귀가 말을 달려가며 짐짓 등을 보이는 허점을 노출시켰다. 자소는 무사 특유의 순각적인 본능으로 설인귀의 허점을 감지하고 바로 있때다 싶어 설인귀의 등을 향해 창을 힘껏 내질렀다. 그때 갑자기 검은 물체가 허공에 펴지면서 자소를 향해 덮쳐 왔다. 자소는 순간적으로 왼팔을 들어 나아오는 그물을 간신히 붙잡아서 설인귀 쪽으로 되던졌다. 설인귀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막 왼쪽으로 돌고 있는 찰나였다. 자소가 되받아 던진 그물이 하필이면 설인귀의 말머리를 덮어씌우고 만 것이다. 그물에 갑자기 눈을 가리운 설인귀의 적토마가 놀라 하늘을 향해 용솟음쳤다. 히 히 힝. 설인귀는 길길이 뛰는 말을 제어하려고 했으나 역부족, 뒤이어 설인귀의 몸뚱이가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자소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설인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창을 설인귀를 향해 힘껏 꽃았다. "악!-." 양쪽 군사들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자소는 말머리를 돌려 고구려 진영 쪽으로 천천히 되돌아왔다. 기겁을 하고 놀란 당군 쪽에서도 여러 명의 장수들이 일시에 뛰어나왔다. 당군의 장수들이 쓰러져 있는 설인귀에서 이르기 전에 분명 죽은 줄 았았던 설인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소는 말에서 떨어진 설인귀를 찌르려는 순간 생각을 바꿨던 것이다. 어차피 오늘의 싸움을 정정당당한 양군의 무예 시합이었던만큼 상징적으로 설인귀의 죽음을 선고한 것으로 족했다. 이렇게 해서 두 장수의 끈질긴 싸움은 120여 합 만에 고구려 대형 자소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종합적으로 동률이었지만 총대장간의 대결에서 이긴 고구려군의 사기가 한층 드높았다. 양군의 무예 시합이 있고 나서도 닷새 동안 전투는 여전히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안한 가운데서 이러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자 펴라성 백성들은 어느덧 마음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군사들이 점심을 막 끝낼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일진광풍이 불더니 회오리바람이 펴라성 서문 밖 들판에서 일어나 모래와 먼지를 하늘로 빨아올리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회오리바람을 피하려고 모두들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성책 위에 꽂아 놓으 ㄴ고구려군의 기의 중동이 부러져 나간 것이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다음 자소는 아무래도 괴이쩍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펴라성에서 점술사로 이름이 높은 검추를 불러다가 점을 치게 했다. 검추는 눈을 감고 한동안 점통을 흔들어 댔다. 점통을 흔들다가 점통 안에 들어 있는 젓가락을 뽑아 만져 보고 또 점통을 흔드는 일을 한참이나 반복하더니 이윽고 점괘가 풀린 모양이었다. "무슨 변괴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자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서북쪽에서 근심이 있습니다." "서북쪽에. 근심이라. 그러면?" "서북쪽에서 손님이 오는데 근심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길시는 언제고 흉시는 언제인가?" "오늘은 길시가 없고 흉시가 자시(밤 12시)입니다." 자소는 길시가 없다는 말에 망연해 하다가 검추에게 내일 일진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검추는 다시 점통을 한동안 흔들더니 이윽고 무릎을 탁 치며 다가앉았다. "있습니다." "그게 언제요?" "아주 대길운입지요. 바로 내일 축시(새벽2시)부터 시작됩니다." 검추의 말을 듣고 보니 뭐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까닭 없이 소각 상태가 보름씩이나 지속될 이유가 없었다. 자소는 특별히 군사들에게 명해 당군의 진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고 따로 300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 대기시켜 놓았다. 그날 자소가 성루에서 유심히 살펴보니 당군의 동태가 평시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병사들의 움직임도 유난히 부산스러운 모습이었고 그날 저녁 밥짓는 연기가 하늘로 뻗쳐 오른 것도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술시(밤 8시경)가 되자 자소는 주위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군사들을 성밖으로 내보내 성벽 50보 근처에 유황과 염초를 묻게 하고 그 위에 관솔기름을 흥건히 뿌려 놓았다. 또 그 밖의 수성 준비도 세심하게 시켜 놓았다. 횃불, 포차 그리고 물을 끓이는 가마솥을 넉넉히 준비해 장작불을 계속 지피게 했다. 이윽고 술시가 지난 무렵, 자소는 따로 뽑아 놓은 병사들을 몰래 성벽 밑으로 내려보냈다. 300명 중 30명을 제외한 270명의 병사들은 무기 대신 북과 꽹과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30명은 기름이 묻은 솜뭉치를 지니게 했다. 그리고 횃불이 오르면 행동을 개시하라고 군령을 주었다. 검추의 점괘는 영험했다. 밤이 깊어 자시에 이름 시작, 갑자기 어둠을 응시하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외침이 물결쳐 왔다. "적병이다!" 아무리 캄캄한 그믐밤이라고 해도 수십만에 이르는 당나라 병사들이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는 물결이 펴라성벽에서부터 100여 보 밖에 이르자 이쪽 병사들도 그 움직임을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벽 위에 고구려 병사들은 기침소리 하나 없이 모두 숨을 죽였다. 야습 병사들을 지휘하고 펴라성 가까이 이른 장손무기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펴라성벽 50여 보 거리까지 다가갔으나 펴라성은 쥐죽은 듯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쉿! 아무래도 수상쩍다." 장손무기는 오랜 전쟁터에서 체득한 육감이 작용했는지 바로 옆에서 따라오는 그의 아장 사마진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응답을 한 것은 장손무기의 뒤에 바짝 붙어 오던 신라 장수 김인문의 목소리였다. "장군, 너무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조용할 수가 있는가?" "모두들 곤한 잠에 떨어졌겠지요." 신라의 각간이며 당군의 부장 김인문은 원래 문관 출신이었다. 전쟁터에서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부스러지는 온갖 고초를 겪은 무관과 평생 궁궐에 틀어박혀 글줄이나 쓰는 문신의 육감을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장손무기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던 야습이었다.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돌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 "와! 와!" 당군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미리 준비해 온 수십 개의 사다리를 들고 와 성벽에 걸쳤다. 당군의 공격 명령을 신호로 고구려군측에서 즉시 포차을 작동했다. 어른 한아름이나 되는 바윗돌이 성벽을 넘어 당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어서 쏘아 대는 고구려 군사들의 화살이 바윗돌 사이를 빈틈없이 메웠다. 펴라성 서문 들판은 금세 아비규환의 장소로 변했다. 펴라성에서 포차가 쏘아 대는 바윗돌에 맞거나 화살에 상한 당군들이 지르는 신음소리는 차마 귀로 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그러나 이날 밤 야습에 동원된 당군은 20만, 이와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당군의 기세는 기필코 펴라성을 아주 뿌리채 뽑아 버리려는 듯이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돌격!" "돌격!" 지칠 줄 모르는 당군의 돌격에 펴라성 밑은 금세 당군의 시체로 언덕을 이룰 지경이었다. 그래도 당군은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이렇게 한식경이 지나자 펴라성벽에 당군의 사다리가 드문 드문 걸쳐졌고 당군들이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당군의 머리 위에는 펄펄 끓는 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끓는 물을 뒤집어쓴 당군은 흡사 독약 먹은 짐승처럼 성 밑으로 떨어졌다. 끝까지 기어오르는 당군은 여지없이 창에 찔리고 칼에 쓰러졌다. 이날 당나라 병사들이 다른 때보다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든 것은 그날 아침 대총관 이세적의 이름으로 방을 붙여 놓은데 있었다. 내용인즉 병족로서 제일 처음 펴라성에 올라가 당기를 꽂는 자는 황금 만냥 광 태수 자리에 붕하고 고구려 미인 10명을 처첩으로 주기로 약속했다. 또 장수의 경우는 황금 2만 냥과 제후에 봉함은 물론 따로 고구려 미인 20명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 평생 가난한 홀아비 신세를 못 면하고 있던 많은 당병들은 계집과 황금에 눈이 뒤집혀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 것이다. 양군의 싸움이 어지간히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펴라성 병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밝혀든 것이다. 그리고 준비해 둔 불화살을 펴라성 50여 보 밖 유황, 염초를 파묻고 관솔기름을 뿌려놓은 지점을 향해 쏘아댔다. 이윽고 불길이 치솟고 벼락치듯 폭발음을 냈다. 꽝꽝 터지는 폭음과 함께 불길은 삽시간에 무섭게 타올라 펴라성책과 불길 사이에 낀 수많은 당군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더러는 불길을 헤치고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성난 불길에 갇혀 성벽 밑에서 우왕좌왕하던 당군들은 불길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타 죽어 갔다. 일찍이 동서고금에 없었던 소름끼치는 소사의 현장이었다. 뒤이어 펴라성의 서문이 열리며 한 떼의 고구려군이 밀려나왔다. 모두들 장창을 꼬나 쥐고 도망치기에 바쁜 당군을 쫓아다니며 사살했다. 말머리를 급히 돌려 자기 진영 쪽으로 달아나던 당군 양습대장 장손무기는 밤하늘을 우러르며 장탄식을 했다. "아! 내가 김인문의 말을 좇아 일을 크게 그르쳤구나." 그러나 장탄식도 잠깐, 어떻게 된 일일까? 당 진영의 막사 여기 저기서 불꽃이 오르더니 순식간에 막사가 화염에 뒤덮이고 역습을 기도한 고구려 병사들이 지르는 함성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진중에서 야습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대총관 이세적은 사태를 짐작하고는 얼굴색이 변했다. "아! 자소. 그대 때문에 내 운도 여기서 끝나는가?" 이세적은 계속 신음소리를 토해 냈지만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세적은 불길에 휩싸인 진영에서 옴싹달싹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통탄했다. 결국 이세적은 황급히 마읍산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패전한 당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이 울분을 씹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읍산까지 도망간 당군은 다음날 정오까지 기다려서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점검해 보니 어젯밤 죽고 부상당하고 도망친 군사들이 거의 20만 명에 가까웠다. 당군측으로 보아서는 안시성 전투이래 최대의 참패였다. 이세적은 하는 수 없이 마읍산에다 진을 치기로 했다. 그날 밤이 깊도록 40여 만의 살아남은 병졸들을 동원해서 새로운 진을 치기에 바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진짜 야습은 고구려군의 자소가 계획하고 있었다. 아직도 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군과의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었다. 마침 당군이 참패해 마읍산까지 물러난 마당에 야습을 하여 이세적 이하 몇몇의 핵심 장수들을 베어 버리면 막다른 지경에 빠진 당군은 이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물러날 터였다. 그래서 자소는 날래고 싸움에 능한 병사 50명을 추려 뽑아서 둘째 아들 자영을 야습군의 지휘자로 삼았다. 자영은 열 아홉으로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아버지 자소를 닮아 무예가 출중한데다가 영리하고 다대해서 자소가 생각하기에도 이 일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영아! 이번 야습의 중요성을 알겠느냐?" "예, 아버지." "이번 출전에 고구려의 운명이 달려 있느니라. 한치의 실 수가 없도록 해라." "명심하고 있습니다." "욕이성에서 죽은 너의 형, 자수를 생각하며 부끄러움이 없이 싸워다오." "예.." 자영의 눈이 금세 붉어졌다. 그때 끼어 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막내딸 나라의 약혼자 자모였다. 자모도 펴라성 수성전에 조장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오냐, 너도 함께 가거라." 그날 해시(저녁 9시), 단도만을 몸에 지닌 고구려 야습군 50명은 성을 빠져나갔다. 마읍산을 향한 고구려군의 검은 그림자는 마치 표범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믐밤은 칠흙같이 캄캄했다. 자영이 야습군을 이끌고 키가 넘게 자란 갈대 숲을 헤치며 두세 시간쯤 갔을까, 멀리서 보아도 당군의 임시 막사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이 나타났다. 아직은 시간이 일렀으므로 두어 시간 정도를 갈대숲 속에 머무르면서 기슴 준비를 했다. 옷은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얼굴과 알몸에 빈틈없이 검댕을 칠했다. 그리고 제각기 짧은 단도를 하나씩 꼬나 쥐었다. 50명이 함께 행동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으므로 10명씩 5개조로 나누어 행동하기로 했다. 또 피아간의 식별이 곤란할 때를 예상해서 그날 밤 아군끼리의 군호를 정했다. '마리(고구려 말로 산을 가리킴)'하면 상대방은 '라(고구려 말로 강)'로 되받아 응답하기로 했다. 그리고 당군 막사에서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후퇴하기로 약정을 했다. 어느덧 삼경(밤 12시)이 지나자 당군 진영도 어젯밤의 야습과 진지 이동으로 피곤했던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자영은 당군 막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오늘밤 기필코 당군 대장 이세적의 목을 따는 거다.' 자영은 야습군을 이끌고 살금살금 기어서 당군 진영 가까이 다가갔다. 늘어선 당군의 임시 막사 앞에 보초 명 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자영은 날랜 군사 다섯 명을 차출하여 뒤로 돌아가서 불시에 세 놈을 덮치고는 미처 소리 지를 짬도 없이 날카로운 단도 끝을 심장 깊숙이 박아 넣었다. 이렇게 해서 50명의 고구려 야습군은 무난히 당군 막사 안으로 침입하는 데 일단은 성공했다. 다음 야습군은 다섯 조로 나뉘어 먹이를 찾아 흩어졌다. 자영이 이끄는 10명의 제1조는 당군의 장수들이 자고 있는 막사를 찾기 위해 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곳 저곳 막사안에서는 당군들이 짐짝처럼 한데 널브러져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장수들이 자고 있는 막사를 찾기는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자영의 1조가 드디어 장군 막사를 찾아냈다. 당군 진영 중심부쯤 들어갔는데 막사 하나가 주위의 다른 막사에 비해 반듯하게 지어져 있고 막사 앞에는 보초 두 놈이 성 있었다. 자영은 망설일 것도 없이 불시에 덤벼들어 보초 두 놈의 목을 단도로 찔러 잠재웠다. 연후에 막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당군 두 놈이 큰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한 놈은 몸집이 장대하고 또 한 놈도 팔다리가 길고 얼굴이 온통 구렛나룻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면 필시 당군의 일원대장임이 분명했다. 자영과 부하 둘이서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갔다. 한 놈이 무슨 기척을 챘는지 꿈틀했다. 자영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잠꼬대를 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자영과 부하들은 동시에 두 놈의 시잠과 목을 향해 단도를 내려 꽂았다. "헉!" "끄르르륵" 급소를 맞고서 예사 사람들과는 달랐다. 어떻게나 힘이 좋은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는 상체를 일이키려고 버둥거리다가 이내 푹 쓰러졌다. "끄르르, 꺽 꺽 꺽 ." 목구멍이 막히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숨이 넘어갔다. 자영의 조는 막사를 빠져 나와 이동했다. 그런데 아뿔싸! 맞은편 골목에서 이쪽으로 돌아나오는 또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마주친 것이다. 숨간 자영과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주춤 섰다. 양측간에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마리!" 자영이 먼저 나직한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군호를 댔다. 여차하면 덤벼들 태세를 취하면서, 그런데 저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라!" 자모 조의 야습군들이었다. 자영의 조는 다시 막사를 기웃거리다가 어렵지 않게 장수 하나를 처치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벌써 한 식경이 지난 것 같아 이쯤에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조들도 족히 당나라 장수 몇 놈씩은 해치웠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자영이 당군 막사에 불을 지르려고 마악 쌈지 속에서 부싯돌과 마른 쑥을 더듬어 꺼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소리가 점차 커지는가 싶더니 금세 당군 진영이 용광로같이 들끓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곳 저곳 막사에서 당군들이 튀어나오며 고함을 질러 댔다. "불이야!" "적군이다!" 자영 일행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재빨리 출구를 향해서 뛰었다. 병영 안의 좁은 골목은 마치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빠져 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도중에 막사 밖으로 뛰쳐나온 당군들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그냥 자기네들의 동료인 체하면서 지나쳤다. 진영을 거진 빠져 나왔다 싶은 곳에 한떼의 당군이 골목 어귀를 지키고 있었다. "솰라 솰라?" ".." "솰라 솰라?" 자영은 순간적으로 그들의 군호라는 생각이 들자 번개처럼 그들을 덮쳤다. 서로 때리고 찌를 싸움도 잠시, 자영 일행은 뒤이어 갈대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군의 순찰대도 갈대숲 속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가쁜 숨을 놓아 쉬며 처음 옷을 벗고 얼굴에 검댕을 칠했던 장소에 와보니 벌써 1개조 10명이 한걸음 먼저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잠든 당군을 일시에 깨어났을까. 아마도 다른 조의 야습군이 잠든 당군을 잘못 건드려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발칼 뒤집히게 만들었으리라.. 조금 후에 또 다른 한 조가 도착했다. 그러나 돌아온 숫자는 모두 일곱. 나머지 3명은 당군과 혼전중에 당군에게 맞아 죽었거나 붙잡혔을 것이다. 자영은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조장에게 물었다. "그럼, 또 다른 2개조는?" "도망쳐 나오면서 언뜻 보니 그때까지 어귀에서 당군과 싸우고 있었어요." 자영은 몸을 벌떡 일으켜 다시 당군 막사 쪽으로 달려갔다. 자영의 뒤를 열대여섯 명이 함께 따라 나섰다. 당군에게 포위되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야습군 몇 명이 보였다. 자영은 생각할 틈도 없이 싸움에 뛰어들어 절대위기에 처한 야습군 6명을 구해 먼저 돌려보내고 마악 되돌아서려는데 또 골목안에서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자영 장군!" "살려 주세요." 언뜻 보아도 열 명쯤 되는 야습군이 당군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영은 문득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지만 차마 당군에게 붙들려 가는 부하들을 모른 체하고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영이 나머지 야습군을 구하기 위해 잽싸게 골목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앗!" 하고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자영의 머리 위로 검은 물체가 날아왔다. 쇠그물이었다. 순식간에 자영은 짐승처럼 쇠그물에 옭아매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 당군 진영에서는 줄초상이 났다. 그날 밤 야습군에 의해 죽은 당군이 무려 200명이 넘었다. 곧 장수급 2명, 이들은 부여도 부총광 장항과 군무기사통군 유억겸이었다. 부장급 22명, 아장급 60명, 나머지 100여 명은 야습군들과 싸우다 죽은 보초병들이었다. 하늘은 끝내 고구려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세적을 비롯한 당군의 주요 지휘관 몇 명은 죽지 안고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사실 야밤에 4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 막사를 뒤져 이세적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운도 뒤따르지 않았다. 자소는 살아서 돌아온 야습군들에게서 소상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자영이 행방불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침나절 내내 성책 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날 오시(낮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펴라성 성책에서 바라다보니 20만 명이 넘는 당군이 기치를 나부끼며 펴라성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펴라성 서문 쪽으로 다가오는 당군의 선두에 선 병졸들이 무엇을 떠메고 오는 것이 보였다. 당군과의 거리가 500보, 300보, 점차 가까워졌을 때, 당군이 떠메고 오는 것은 큰 나무 기둥임이 식별되었다. 이윽고 서물 밖 150여 보 지점에서 당군의 행렬이 멎었다. 그런데 아! 그 통나무에는 사람이 묶여 있었다. 바로 자영이었다. 자영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발가벗은 몸에 머리는 이마까지 헝클어져 내리고 몸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다 하더라도 심한 상처로 거의 초죽음 상태에 있음이 분명했다. 이 광경을 성책 위에서 내려다본 자소는 하마터면 헉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눈앞이 금세 노래졌다. 그때 당군 진영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소 장군! 자소 장군!" "..." "네 자식을 살리려거든 냉큼 성문을 열어라!" "..." "만약 응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 아들을 죽이겠다." "..." 그때 자소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자소 장군! 차라리..." "성문을 열고 나가 자영을 구해 옵시다." ".." 자소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자소는 마음속으로 벌써 수십 번을 성밖으로 나가 당군과 맞붙어 자영을 구해 오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패전을 하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고구려군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자소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순간만은 인간이기에 앞서 천년사직 고구려의 운명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쯤의 시간이 흐르자 자소는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소는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만 가로 저었다. 20만 명의 당군이 버티고 있는 마당에 기껏 2,3만 명이 성문을 열고 나간들 싸움이 될리 만무 했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펴라성이 불시에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때 당군측에서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윽박질러 왔다. "자소 장군은 듣는가? 성문을 열어라." "..." 자소에게서 끝내 대답이 없자 당군은 최후 통첩을 했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네 자식을 죽이겠다." 성책 위에서 처참한 심정으로 바라다보고 있던 고구려군 병사들이 그만 움찔 놀랐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었다. 자기는 죽어도 좋으니 절대 성문을 열고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당군 두 놈이 시퍼런 장두칼을 움켜쥐고 통나무에 묶여 있는 자영에게 달라붙더니 자영의 살점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칼날이 닿는 곳마다 시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영의 몸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때 또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당군 속에서 들려왔다. "멈춰!" 자영의 살가죽을 벗기던 두 놈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자 신라 장수 하나가 당군을 대신해서 또 외쳤다. "자소!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자식을 살리고 싶지 않느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데없이 화시위 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휙-. 그리고 화살은 자소에게 외쳐 대던 신라 장수의 머리통에 보기 좋게 박혔다. 급소에 화살을 맞은 신라 장수가 뒤로 벌렁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또 하나의 활시위 소리가 들렸다. 휙-.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번째 화살은 정확히 통나무에 묶여 있는 자영의 심장에 꽂혔다. 뒤이어 자영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대의 화살을 거푸 쏜 자소는 활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자소는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그때까지도 성문을 열지 않고 버티고 있던 펴라성의 수비군들은 자소의 뜻밖의 명령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냉큼 성문을 열지 못하겠느냐!" 또다시 터져 나오는 자소의 벽력 같은 호령에 드디어 성문이 열렸다. 자소는 장창을 꼬나잡고 단기로 성을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둘째 아들 자영의 죽음을 직접 집행한 자소는 이제 아버지인 자신이 당군의 생사를 판가름내야 할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자영이 죽어 가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진한 감동으로 휩싸여 있던 수비군들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저마다 앞다투어 자소를 따라 나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우리도 뒤따라 죽자.' 불시에 펴라성 성문이 열리며 한떼의 고구려군이 노호하며 달려들었다. 자영이 아버지 자소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있던 당군은 하나 둘씩 꽁무니를 뺐다. 그러자 삽시간에 전염이나 된 듯 당군들은 모조리 마읍산 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무인지경으로 뒤쫓아가며 무참하게 당군을 쓰러뜨렸다. "자영의 원수를 갚자!" "되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여기저기서 지르는 고구려군의 고함소리가 온 들녘에 요란하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마읍산 입구까지 쫓아간 자소는 추격을 멈췄다. 마읍산은 골짜기가 깊어 복병이라도 매복시켜 놓았다면 자기를 뒤따라온 고구려 병사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승을 하고도 불과 한 달 사이에 두 아들을 잃은 자소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했다. 자소가 펴라성으로 되돌아와 보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둘째 오빠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막내딸 나라였다. 나라는 아버지 자소를 보자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 이제부터는 제가 아들 노릇을 하겠어요." "오냐, 그래라." 자소는 비로소 눈시울이 젖어 왔다. 다음날부터 펴라성 수비군 중에서 남장 여인이 하나 등장했다. 그녀는 자소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 패전의 소식을 들은 이세적은 덜컥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는 장안으로 회군할 도리밖에 없었다. 더 이상 싸워 보아야 수나라 때의 양제처럼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다. 마읍산에서 철수 준비를 시작한 당군에게 장안의 당고종으로부터 파발마가 온 것은 그 다음 다음날인 8월 29일. 급히 서찰을 뜯어본 대총관 이세적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옳지, 이거라면..' 이거라면 그날 밤으로 대장들과 모사들을 불러 비밀리에 작전 계획을 다시 짰다. 다음날 아침, 당군 진영에서 보낸 편지를 묶은 화살 여러 대가 펴라성안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편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대 고구려군 보장왕께 올립니다. 불초 이세적은 고구려 국왕께 엎드려 감히 몇 말씀 드립니다. 저희 당군이 귀국의 영토를 범한 것은 천만 번 잘못된 일인 줄 아는지라 백배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하오나 귀국의 연씨는 본래 제 아비 때부터 무뢰한으로서 인자대덕한 선왕(영양왕)과 백관을 죽이고 또 대왕(보장왕)을 유폐시켜 정사를 제 마음대로 휘둘러 왔습니다. 그 결과 나라에는 기강이 없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기아선상에서 헤매인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연씨 형제는 만고에 드문 역적인고로 이를 가만 두면 그 화근이 커져 좀처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군 고종께서는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어 저에게 특별히 분부하여 극악무도한 연씨를 제거하고 어진 대왕을 도와 고구려가 다시 예전과 같이 부흥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당나라는 앞으로 귀국의 촌토도 다침이 없을 것이며 연씨 형제가 제거되는 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즉각 철군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는 바입니다. 이번 당나라 거병한 것은 오로지 이웃 나라간의 우의와 평화를 회복하는데 있음을 거듭 엎드려 말씀드리오니 이점 추호도 의심마시고 통촉하여 주옵소서. 대당 총관 이세적 올림 그즈음 고구려 내부는 당나라측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망해 가고 있었다. 가이없는 요동벌도, 압록수 이남도 그리고 펴라성 이남도 모두 당나라와 신라에게 빼앗기고 남은것이라고는 고립무원한 펴라성뿐인데 활로도 없는 성 하나에 의지해 한달 여를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희망은, 평소에 미워하던 자소의 활약으로 펴라성이 사기를 되찾고 한가닥의 활로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서슬이 퍼런 막리지 남건과 대대로 남산은 매일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술타령이었다. 취하면 시종이고 시녀고 가리지 않고 때리고 발길질을 해대, 측근을 제외하고는 누구 한 사람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구려 조정이 이 지경이 되자, 자연히 보장왕에 대한 감시도 소홀해졌다. 평소에는 연씨 형제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보장왕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지만 연씨 형제의 무단정치가 힘이 풀리고 백성들의 민심이 변하면서부터는 보장왕 주변에도 사람들이 모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시작했다. "대왕마마! 마마께서 이렇게 지내신 지가 벌써 스물 여섯 해가 되옵니다." "어허! 그래. 짐도 벌써 늙었구려." "긴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온다 하였습니다." "그래 꽃도 피고 새도 울면 우리 함께 즐겨 보자구나." 보장왕도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모면하려고 어거지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본시 영특한 기질을 타고 났었다. 늙은 신하들과 겉으로는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세월의 아픔을 담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26년, 보장왕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연씨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며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궁중 안의 좁은 공간에서 죄수처럼 살아야만 했다. 보장왕 자신도 연씨 형제의 무단정치가 어서 끝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일반 백성들과 다름 없었다. 그런던 어느 날, 왕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 한 명이 왕의 침실로 몰래 들어와 허리춤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놓았다. 물론 이세적이 화살에 묶어 보낸 편지 중의 한 장 이었다. 보장왕은 한눈에 읽자마자 숨이 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허 허! 괴이한 일이로고." "상감마마!" 늙은 신하 안승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보장왕도 충격이 너무 컸던지 연방 "허 허." 하면서도 두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마전 당군이 펴라성에서 30리나 떨어진 마읍산으로 진영을 멀찍이 옮긴 다음부터는 아침저녁으로 두번씩 펴라성문을 잠깐씩 열었다. 그 사이를 이용해 인근 마을에서 가축이며 채소등을 날라다 먹었는데 어느 날 당군의 첩자 한 명이 인근 마을의 농민을 가장하고 교묘히 펴라성내로 스며들었다. 첩자는 밤이 으슥해지자 보장왕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대로 예불여상을 찾아갔다. 그리고 품속에 지니고 왔던 황금 두 덩어리를 꺼내 놓았다. 황금덩어리를 보자 예불여상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 이것이 진짜 황금이오?" 첩자는 예불여상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예불여상은 70고개를 넘어 연씨 정부에서 보장왕의 감시자 겸 말벗으로 붙여준 자로서 탐욕스러운 늙은이였다. "아, 그렇고 말굽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 예불 대인 것입니다." 황금에 눈이 먼 예불여상은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그야 간단하지요." 예불여상은 생전 처음 보는 큰 황금덩어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당군 첩자의 계략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나더러 보장왕을.." "그렇습니다. 고구려가 살아 남을 길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고?" "그야 일등공신으로 대접해 드리지요. 여기 바로 그 직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당군의 첩자는 품속에서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내 놓았다. 대당황제가 예불여상을 펴라도 태수로 임명한다는 직첩이었다. 예불여상은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출세는 하고 볼일이었다. 이윽고 예불여상은 당군 첩자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마음속에 한 가닥 거리는 것이 있었던지 첩자에게 물었다. "연씨 형제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야 이치가 간단합니다요." 당군의 첩자는 미리 대답을 준비해 온 듯 예불여상에게 거침없이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예불여상은 첩자가 시키는 대로 다음날 아침 궁궐로 들어가서 보장왕을 꼬드겼다. "전하, 언제까지나 젖비린내나는 연씨 정부 밑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이젠 결심을 하셔야 할 바로 그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럼 날보고 어떡하란 말이오?" "차라리 당군 진영으로 가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예불여상의 뜻밖의 말에 보장왕이 펄쩍 뛰었다. "날더러 항복을 하라구!" 그러나 예불여상은 타고난 모사꾼이었다. "결코 아닙니다요. 지난번 이세적의 편지에 씌어 있듯이 잠시 몸을 피하고 계시면 당군이 연씨 정부를 도륙 낸 후 이 나라의 사직을 전하께 다시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때는 전하께서도." 연씨 정부에 너무 오랫동안 눌려 지내온 보장왕은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그만 분별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도 일말의 불안은 있었던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연씨 집정부 사람들이 가만이 있을까?" 역시 예불여상은 빈틈이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요." "그래도." 예불여상은 반신반의하며 망설이는 보장왕 곁으로 바짝 다가가 문득 말소리를 낮추고 당군의 첩자에게서 들었던 계교를 설명했다. 보장왕의 얼굴에 차츰 화색이 돌았다. 다음날 아침 사시(오전 10시경)에 보장왕의 어명이 연씨 집정부에 도착했다. 어명을 개봉해 본 연씨 집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원! 이렇수가?" "아니! 왕이 이젠 머리가 아주 돌아 버렸나." 어제 저녁 늦도록 먹은 술로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남건, 남산 형제는 보장왕의 어명을 보자마자 길길이 뛰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뭐, 당군 진영으로 가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간단 말이냐. 누가 시켜준 임금자리인데 제멋대로 행동한단 말이냐." 남건은 결단이 섰는지 무사들을 불렀다. "냉큼 대궐로 가서 노망한 왕을 묶어 오지 못할까!" 남건과 남산의 호통소리에 연씨 정부를 호위하고 있던 무사 200여 명이 안뜰에 집결했다. 연씨 정부의 호위병들이 남건, 남산의 서슬에 겁을 먹고 보장왕을 묶으러 막 대궐을 향해 떠나려는데 이 소식을 들은 연씨 정부의 근위대장 대인 연개수오, 고산수, 고혜상 등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들 세 명은 대궐과 연씨 정부를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각기 1만 명씩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실은 성책 위에서 당군과 싸우는 자소, 온상덕, 을불수, 고문간, 대청군 등이 연씨 정부를 배반하지나 않을까 하여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꾀가 많아 연씨 정부의 모사 노릇을 하고 있는 고혜상이 남건, 남산 형제를 가로막아 섰다. "막리지! 아니 되옵니다. 어서 명을 거두십시오." "뭐이? 명령을 거두라고?" "그러하옵니다." "보장왕이 당군 진영으로 가서 자진해 항복하겠다는데도?" "그러면 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남건은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어째서?" "허수아비 보장왕을 해치면 백해무익일 뿐입니다. 즉 송장치고 살인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격이지요. 또 거기다가.." "거 갈수록 괴이한 말이로고." "보장왕이 막리지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 자소 등 수비군의 창칼이 이쪽으로 돌려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백성들도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음." "그리 되면 막리지나 소인들의 목숨이 오늘 해를 넘겨 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건, 남산 형제가 고혜상의 진언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듯도 싶었다. "그럼 어떡한다?" "차라리 전화위복으로 만드십시오." "전화위복이라?" "저에게 좋은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고혜상이 주위를 물리치고 남건, 남산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다음날, 곧 보장왕 26년 8월 30일. 새벽같이 펴라성에서 항복사절이 당군 진영으로 달려갔다. 당총관 이세적은 아침 식사를 하려고 마악 숟가락을 들다가 펴라성에서 항복사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침상을 물리고 항복사절을 접견했다. 항복사절은 이세적에게, 오늘 미시(오후 2시경)에 보장왕의 명을 받들고 왕제 고간 이하 백관들이 펴라성 서문을 열고 나와 항복을 할 테니 예를 갖추어 영접해 달라는 보장왕의 친서를 전하고는 펴라성으로 되돌아갔다. "아하! 정녕 하늘이 나를 도우신 게다." 이세적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급히 서둘러 군사 10만 명을 펴라성 서문 밖에 정렬시켰다. 그리고 임시 장막을 세워 왕제 고간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다. 장막 전후 좌우로는 큰 경사나 만난 듯 오색 깃발을 꽂고 북과 징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고 있었다. 펴라성책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다보는 자소는 기가 막혔다. 자소는 싸움이 이미 종반으로 접어들어 머지않아 당군이 철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군이 역공을 해서 당군을 쳐부술 바로 그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장왕이 스스로 당군에게 항복하러 가는 해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일시에 궁궐과 연씨 집정부로 쳐들어가 왕과 남건, 남산 형제를 요절낸 다음 자기도 자결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군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가 생사를 결판내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 생각이 깊은 자소는 신하로서 왕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혼자서 삭이고만 있다니 심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치의 늦춤도 없이 앞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 미시. 어명에 의해서 펴라성 서문이 열리고 항복사절의 선두가 빠져 나갔다. 다음 왕제 고간과 왕자들을 태운 수레가 뒤를 이었다. 왕족 일행을 바짝 뒤따르는 또 한 대의 수레가 보였다. 뜻밖에도 그 수레 안에는 대대로 남산과 고혜상이 타고 있었다. 대대로 남산의 수레에 꼬리를 물고 대로 연개수오, 고사지, 안승강 등 80여 명의 문무백관이 차례로 서문을 빠져 나갔다. 당군의 장막 안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이세적은 왕제 고간과 왕자들의 수레가 펴라성 밖으로 빠져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왕제의 수레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이세적이 감히 왕제 저하 앞에 문안을 드리옵니다." "오! 이세적 장군, 그간 고생이 많았소." "아니옵니다. 왕공하옵게도 불초 소인이 왕제 저하의 용안을 뵈오니 흐렸던 일월이 다시 빛나는 것 같사옵니다." "경이 나를 이렇듯 환대해 주니 좀더 일찍 왕께 말씀 드려 결심케 못한 나의 잘못이 오히려 부끄럽소." 다음은 이세적과 남산 사이에 일문일답이 시작되었다. "대대로 각하! 이처럼 큰 결심을 해주어 오늘부터는 만백성이 발을 뻗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소." "이세적 장군! 수륙 수만 리를 달려와 이런 변방에서 고생케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오." 피차간에 수인사가 끝나고 보장왕제 고간과 이세적 일행이 장막에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풍악이 울렸다. 그리고 차려 놓은 주안상을 사이로 축배가 돌았다. 성책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자소의 입에서는 깊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롭구나. 고구려 천년사직이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내 죽어 구천에 가면 무슨 낯으로 조상들의 얼굴을 대할꼬." 자소는 깊은 좌절감 속에서 20여 년 전 안시성 싸움에서의 양만춘 장군, 그 싸움에서 죽은 형 자막, 욕이성에서 죽은 큰아들 자수 그리고 바로 엊그제 죽은 둘째 아들 자영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때였다. "자소 장군!" "자소 장군!" 등뒤에서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 보니 거기에는 펴라성 북쪽과 동쪽의 수비를 맡고 있는 대청군, 고문간, 온상덕, 을불수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있었다. "자소 장군,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오. 한바탕 해치우고 함께 죽읍시다." 격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질이 급한 대청군이었다. "맹세코 보장왕 이하 간신배들의 목을 따고 이세적과 한판 겨룹시다. 자소 장군! 어서 결심해 주십시오." 을불수와 온상덕, 고문간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좌절감에 빠져 있던 자소의 목소리는 의외로 냉정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아니 되오." "아니? 이제 또 무엇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기다리면 망한 나라가 다시 되살아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고구려라는 나라는 망했지만 고구려 민족은 망하지 않았소.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하오. 온갖 수모를 당하더라도 우리가 끈질기게 살아 남아야만이 망해 버린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도 있소." "그래도 당장 이 분하고 원통함을 어떻게 참으란 말입니까?"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오.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을 남겨 주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참고 죄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오." "..." 대청군 등의 장수들은 자소가 침착하게 하는 말이 뜬구름 잡듯이 허망하게만 들렸지만 그렇다고 자소의 말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설 명분도 없었다. 냉정을 되찾아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말은 분김에 모두가 자폭해 버리자는 논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할말을 잃고 모두들 침묵해 버렸다. 그때쯤 당군의 장막 속에서는 축배의 잔이 몇 순배 돌고 난 다음 당군 대총관 이세적이 술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대대로 남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대로. 언제쯤 펴라성에 입성할 수 있겠소?" "대총관,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군이 입성할 때 소란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수비군의 무장해제도 시켜야 하고 또 호구며 창고의 물자도 일일이 조사하여 항복 조서를 만들어야 하니 다소 말미를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이세적은 속으로 다 잡은 고구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놔야겠다고 결심했다. 섣불리 방심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던 말을 슬쩍 돌려서 남산을 다그쳤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많이 지친데다 날씨도 추워지니 입성하여 우선 시급한 불편을 덜어야 되겠소. 우리측이 입성할 날짜를 확실히 정해 주시오." "앞으로 5일 이내에 모든 준비가 다 되리라고 봅니다." 이세적의 마음을 조급했지만 보장왕제 고간 이하 백관이 모두 항복해 자기 진영에 와 있는 이상 고구려측을 닦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사자를 장안으로 보내 고구려가 항복한 사실을 당고종에게 알리게 했다. 그날 이후 3일 동안은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고구려군측이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은 여전히 닫힌 채였고, 군사들은 성책 위에 앉아 하는 일 없이 500여 보 떨어져 있는 당군 진영의 법석대는 잔치 구경을 하고 있었다. 또 자소는 자소대로 상부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뿐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항복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쟁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은, 연씨 집정부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연락관이 찾아와 펴라성의 수비를 더욱 엄중히 할 것을 이르고 가는 것이었다. 참다 못 한 자소는 연씨 집정부로 막라지 남건을 찾아 나섰다. "막리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허 허! 이것이 바로 당군의 허를 아는 위계일세." "아니 위계는 뭐고 또 허는 뭡니까?" "적군의 허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병서도 못 읽었는가?" 남건의 의중은 항복이 아니라 항전이었다. 자소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괴이쩍은 일이었다. 그러나 항전이라는 남건의 말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이제 당군은 절반이 죽었습니다. 고구려의 국토회복의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자소의 말을 들은 남건도 기뻐했다. "알고 있소. 계속 밀고 나가시오." 막리지 남건의 진중을 확인한 자소는 그 길로 되돌아왔다. 보장왕제 고간 이하 문무백관들이 당군 막사에 머문지 4일째 되는 날 미명이었다. 병사들이 성책 위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고 군데군데 보초들만이 망을 보는데 희미한 어둠 속에서 펴라성 서문을 향해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보초병들이 숨을 죽이며 동정을 살폈다. 검은 그림자는 점차 서문 가까이 이르더니 50여 보쯤 떨어져서 성을 올려다보고 소리를 지를 것이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보초병이 정체를 물었다. "너는 누구냐?" "대인 고혜상이다." "대인? 거짓말 마라." "나는 진짜 대인 고혜상이다. 대대로의 명을 받고 되돌아왔으니 속히 성문을 열어라." 보초병은 급히 이 사실을 자소에게 알렸다. 연일 피로한 가운데 모처럼 단잠을 자고 있던 자소는 벌떡 일어나 성책 위로 올라갔다. "진짜 대인 고혜상인가?" "그렇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자소는 급히 횃불을 밝혀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히 고혜상이었다. 그렇다면 막리지 남건이 말한 대로 고혜상은 당군의 허실을 정탐해서 돌아온 것일까. 알고 보면 모든 것은 연씨 정부의 모사 고혜상의 계략대로였다. 이제 연씨 정부로서는 거추장스럽기만한 보장왕의 말을 들어 주는 척 왕제 이하 문무백관들을 항복사절로 보내 버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당군의 허실을 정탐한다는 구실로 남산과 고혜상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수나라와의 싸움 때 을지문덕 장군이 거짓 항복하여 적의 허실을 탐지해 낸 고사를 흉내낸 것인데, 도대체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당치도 않는 어리석은 짓거리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거짓으로 항복했을 때는 고구려가 살수에서 수나라와 당당히 맞먹는 힘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양군의 조그만 허실도 싸움의 승패를 가릴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좋은 기회는 다 놓쳐 버리고 이제 펴라성을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는 고구려군측에서 남산이 거짓 항복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갯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고혜상이 탐지하러 갔던 당군의 허실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항복한 문무백관들이 매일같이 성 가까이 와서는 보장왕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어서 빨리 역적 남건을 묶고 항복을 하라고 성화를 대는 것이었다. 이것을 지켜본 민심이 동요되고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어느덧 둘만 모여도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더 이상 남건과 남산 형제의 사병이 될 수는 없다." 자소는 군사들의 불평을 눈치 채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달래기에 바빴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민족을 위해서 싸운다. 당나라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자." 그런데 성안 백성들의 분노는 점차 남건, 남산 형제에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심은 천심이었다. "남건, 남산 형제의 사치와 영화를 위해서 우리의 부모와 처자식이 더 이상 희생당할 수는 없다." "아무렴! 그자들은 못돼먹었다." 한번 터진 백성들의 억눌린 원한이 차츰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구호도 어느덧 격해지고 있었다. "남건, 남산 형제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 형제들이 죽었다." "연씨 형제들에게 가서 그 한을 풀자." "가자, 연씨 집정부로!" "죽이자! 남건, 남산!"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막리지 남건은 급히 측근들을 불렀다. 측근이라야 평소 연씨 형제에게 빌붙어 아부나 하고 비위나 맞추던 고사지, 고산수, 고혜상, 연개수오 등의 쓸모없는 장수들뿐이었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보아야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었다. 그러나 이들도 20년이 넘게 한 나라의 핵심부에서 버텨 온 이력은 있어 자기보호 본능은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이들의 결론은 이러했다. 백성들이 제아무리 들고 일어난다 해도 3만 명이나 되는 호위 군사들을 시켜 창칼로 한 천여 명 찔러 죽여 버리면 무서워 더 이상 덤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소, 대청군, 고문간, 온상덕, 을불수 등의 수비군이 백성들 편을 들어 군사를 몰고 와 자기들의 덮치면 그것으로 자기들의 운명은 끝장이다. 따라서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이들 수비군 대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한 가지 문젯거리가 있었다. 자소 등 수비군 대장을 몰아낸 다음 과연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히느냐는 것이었다. 모두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 고산수가 자신있게 입을 열었다. "막리지 각하, 제가 신통한 도인 한 분을 아옵니다." "도인?" 도인이라는 말에 남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습니다. 도교의 고승이온데 그분의 신통력은 고금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남건은 바짝 흥미가 동했다. "어떤 신통력인가?" "축지법으로 하룻밤에 3천 리를 왕복하고 둔갑술로 하루에도 몸이 100가지의 형태로 변해 그 조화가 무쌍합니다." "ㄲ.."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도사의 해박한 지식으로 말하면 땅에서 하늘까지 모르는 이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막리지 남건 이하 호위군 장수들은 '고구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경탄을 했다. 그래서 남건은 고산수에게 되물었다. "그만 뜸을 들이고.. 그 고승은 어디에 사는 누구인가?" "바로 펴라성 동부에 살펴 신성이라고 하옵니다." 막리지 남건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도승 신성을 불러오게 했다. 첫눈에 보아도 신성은 과연 도인다운 풍모가 있었다. 몸은 장대하지 않았으나 얼굴빛이 훤하게 밝고 하얀 턱수염이 한 자도 넘게 내려와 가슴팍을 덮었다. 그리고 두 눈은 오랫동안 도를 닦은 사람처럼 형형히 빛났다. 남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사! 진작 모셔 오지 못한 것이 본인의 불찰이오. 이 난국을 수습하는데 힘이 되어 주시오." "험! 이 전쟁이 땅에서는 큰일로 보이나 하늘에서 보면 한낱 조그만 불장난에 불과합니다." 과연 도사의 말은 범인과는 달랐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병인년에 삼태성이 북두를 침범해서 일어난 일인데 별것 아닙니다. 본승이 어젯밤 천문을 보니 삼태성의 기운이 이제 현저히 줄어든즉 북 한번 크게 치면 당군은 저절로 퇴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도사님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건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도사의 신통력을 빌려서라도 새로운 전기를 찾고 싶었다. 자소는 그 날로 펴라성 수비군 대장직에서 쫓겨나고 도승 신성이 펴라성 수비군의 병권을 거머쥐었다. 자소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아직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펴라성 내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펴라성 수비군들에게는 병을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와 은거했다. 그날이 9월 초사흘이었다. 이 소식은 금방 첩자를 통해 당군 진영에 전해졌다. 이세적 이하 당군의 장수들은 감격에 겨워 무릎을 꿇었다. "오 오! 이제야말로 천시가 왔구나." "왕제의 계교가 적중했다." 보장왕이 왕제와 남산 이하 98명의 문무백관을 항복사절로 보내 놓고도 그 후 후속 조치가 없어 초조해 있던 당군 진영에서는 일대 희소식이었다. 그 다음날로 이세적은 10만 명의 정예군사를 뽑아 펴라성 서문 밖 들판에 배치시켜 놓았다. 철군 날짜까지 잡아 놓은 당군으로서는 막판에 가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난 셈이었다. 그런데 당군 진영에서는 도사 신성이 수비군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세적의 부장으로 있는 검교도위 사종예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 살 때 당태종 앞에서 시문을 지어 바칠 정도로 신동이었다. 그래서 그는 궁궐에서 당태종과 고종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이번 전쟁에서도 당고종은 이제 스물이 갓 넘은 사종예를 특별히 대총관 이세적의 부장으로 딸려 보냈다. 그런데 그 사종예가 작전회의를 마치고 자기의 본진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장 범종이 그날의 일을 물었다. "응, 좋은 소식이네. 이제 전쟁은 3일 안에 끝나고 한 달 안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네." 범종은 사종예가 하는 말의 영문을 몰랐다. "그사이 상황 변화가 있었습니까?" "자소가 고구려군 총대장직에서 물러났어." 이 말이 삽시간에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날 저녁 이세적이 부대 순시를 하는데 사종예의 부대 병사들이 서둘러 짐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세적은 괴이쩍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리고 발설자가 사종예라는 것을 알고는 대단히 노했다. 당장 사종예를 잡아들이고 군심을 동요시킨 죄를 물어 처단하려고 했다. 주위의 장수들이 당고종이 사종예를 끔찍이 아끼는 것을 참작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자고 간청했다. 하지만 이세적은 고구려의 운명이 바야흐로 백척간두에 있는 시기의 중대성을 감안해 사종예의 목을 베어 긴 장대끝에 꽂은 다음 군중에 조리를 돌렸다. "앞으로 누구든 군심을 동요케 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즉시 죽인다." 역시 백전 노장 이세적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편 펴라성측에서는 9월 4일 미명을 기해 5만 명의 병력이 오랜만에 펴라성 서문을 열고 일제히 성밖으로 밀려 나갔다. 신임 펴라성 수비대장인 도승 신성이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전이었다. 특히 고구려군측에서는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고 도승 신성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늘을 향해 주문을 계속 외며 춤을 추는 자세로 펴라성 문을 열고 나왔다. 도승 신성은 자소가 물러난 뒤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는 군사들을 얼러 댔다. "나는 옥황상제의 아들이다." "와-." "나를 믿고 따르는 자는 그 누구도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이세적은 또한 노회한 장수가 아니던가. 도승 신성이 펴라성 수비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벌써 서문 밖 들판에 군사 10만 명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금세 양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미시경(오후 3시)쯤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당군이 마읍산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도승 신성은 신바람이 나서 당군을 더욱 급하게 몰아붙였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독전을 했다. "어서 추격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당나라 장안까지 쳐들어가자!" 펴라성 서문 성루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본 남건 이하 연씨 집정부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어허! 역시 도승 신성이구먼." "이젠 우리도 살았다. 만세!" 쫓기는 당군은 마읍산에 이르러 깊은 계곡 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도승 신성은 첫 싸움에서 당군의 기세를 꺾자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새끼다." 도승 신성은 안타까웠다. 당군의 후미가 한달음에 손에 잡힐듯하면서도 자꾸만 도망치는 것이었다. "빨리, 빨리 추격하라." 그래서 전군을 더욱 몰아쳐 도망치는 당군을 뒤쫓아 마읍산 계곡 깊숙이 들어갔다. 쾅! 이때 난데없이 어디선가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 포성을 신호로 양편의 가파른 산비탈에서 바윗 덩어리와 통나무들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아뿔싸! 당했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양쪽 산비탈에서 당군의 복병이 개미떼처럼 내려오고 그때까지 쫓겨 달아나던 당군도 되돌아서 고구려군을 덮쳐 왔다. 사태가 일시에 반전되었다. 고구려군은 철통 같은 당군의 포위 속에서 궤멸될 수밖에 없었다. 장소, 백안륙, 장손무기, 설필하력, 학처준 등 당군의 장수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고구려군을 무수히 살상했다. 마읍산의 좁은 골짜기는 고구려군의 피로 냇물을 이룰 정도였다. 도승 신성은 즉시 말고 갑옷을 버리고 병졸로 변장을 하고는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도망쳤다. 다행스러운 것은 유시(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주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군 5만 명을 한꺼번에 다 잃은 신성은 서너 명의 측근들과 함께 산을 타 넘으며 걷고 또 걸어 펴라성에 당도했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겨우 성안으로 들어간 신성이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이날의 패전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필시 자기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막리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어떻게든 내 목숨은 살아야 한다." 도승 신성은 앞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편지 한 장을 급히 써서 자기의 수제자인 오사, 요묘를 말에 태워 당군 진영으로 달려가게 했다. 한 시각쯤 지나 미명 속에서 당병의 거대한 물결이 소리 없이 접근해 왔다. 이윽고 펴라성 문이 열리고, 고구려 900년 사직이 무너지는 최후의 순간,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끌려가는 고구려 백성들 이세적이 당군 40만, 고구려군 포로와 백성 20여만 명을 이끌고 펴라성을 출발한 것은 669년 12월 5일이었다. 행군의 선두에는 당군의 군악대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펴라성문을 빠져 나갔다. 다음에는 당군의 기병 그리고 뒤이어 보병들이 줄줄이 성문을 빠져 나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6일에는 고구려의 중죄인으로 압송당하는 보장왕, 남건, 자소 등이 함거에 실려 나갔는데 신라군의 기병들이 좌우를 어워싸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줄을 잇고 따라가는 수백 대의 소달구지에는 3만 명이 넘는 고구려의 여인들이 빽빽이 실려 있었다. 고구려 여인들이 탄 소달구지가 성문을 빠져 나갈 때,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소달구지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나미야! 못 간다. 이 할미를 놔두고 못 간다." 한 노파가 군중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손주딸이 타고 있는 달구지를 붙잡고 악을 썼다. 대여섯 살 먹은 사내아이도 튀어나와 달구지를 붙들었다. "엄마! 엄마! 가지마, 엉엉." 뒤이어 달구지와 간격을 두고 뒤따르던 수천 명의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가 먼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한떼의 기병들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긴 칼을 마구 휘둘러 군중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비켜! 저리 비켜!" "쌍년놈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달구지 주위에는 삽시간에 칼을 맞고 쓰러진 가족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때마침 눈발이 내려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흰눈을 붉게 적셨다. 그런데 고구려 백성들을 호송해 가는 기병들은 당군이 아니었다. 이세적은 신라군이 말이 통한다 하여 호송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신라 장수 김인문을 비롯하여 대아찬 조주, 그리고 아장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홍원 등이 거느리고 있는 신라군 8천 명이 바로 그들이었다. 신라군은 어떻게든지 당군에게 잘 보이려고 고구려 사람들에게 더 없이 잔혹하게 굴었다. 고구려의 부녀자들을 태운 달구지 뒤에는 2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의 왕족, 관리들과 젊은이들이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손과 손은 포승줄로 열 사람씩 마치 굴비 두름 엮듯 있어 옴짝 달짝도 할 수 없었다. 호송 대열의 맨 마지막은 20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가족 단위로 끌려갔다.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남부여대해서 끌려갔다. 그날 해질 무렵에야 긴 행렬의 마지막이 펴라성을 빠져 나갔는데 이들이 빠져 나간 펴라성은 갑자기 텅 빈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도 애통했는지 밤새도록 마른 번갯불만이 펴라성 하늘을 번쩍거리며 지나다녔다. 60만 명이 넘는 긴 행렬은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북으로 북으로 행군해 갔다. 살얼음이 깔린 강을 건너고 다시 눈덮인 산허리를 몇 굽이씩 돌며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당군이 2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의 고구려 포로들을 붙잡아 가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고구려의 관리와 젊은 남자들을 잡아감으로써 만주 벌판과 한반도에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지는 것이고, 다음은 여자들을 장수들에게 몇십 명씩 노예로 주고 나머지는 아직 홀아비인 병졸들에게 처첩으로 주자는 목적이었다. 당나라에서는 관리나 토호들이 계집을 독차지하고 있어서 병졸로 끌려온 시골 무지렁이들 중에는 평생 가야 여자 한번 접해 보지 못한 홀아비들이 수두룩했다. 한편 고구려의 포로들은 펴라성을 떠난 지 11일째 되던 날 욕이성에 도착했다. 욕이성에는 당군 수비대만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벌써 고구려 포로 가운데서는 추위와 행군에 못 견뎌 앓아 눕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다음날 당군은 행군할 수 없는 포로들 가운데서 남자는 죽이고 젊은 여자들은 당군 수비대의 위안용으로 남겨 놓고 떠났다. 당군과 포로 일행이 압록책에 있는 대행성에 당도한 것은 다음해 정초였다. 북으로 갈수록 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려 젊은 사람들까지도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행군하기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 포로들이 당하는 괴로운은 추위뿐만이 아니었다. 밤이면 또 야수 같은 당군의 만행에 시달려야만 했다. 펴라성을 출발한 날로부터 밤만 되면 당군들이 고구려의 부녀자 포로들을 겁탈하러 여자들 숙소로 기어들어 왔다. 한 방에서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함께 자는데도 당군들은 짐승처럼 여자들을 덮쳤다. 그래서 밤이면 여자들이 토해 내는 신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압록강 어귀에 있는 대행성에서 묵던 날 밤, 자소의 둘째 딸 나선과 막내딸 나라가 묵고 있는 방에도 낯선 그림자들이 어른 거렸다. "바로 여깁니다요." "절세 미녀가 있다는 곳이냐?" "헤 헤, 그렇다니까요." 당군을 데이고 온 것은 나라에게 청혼을 넣었다가 거절당한 예불여상의 아들 춘룡이었다. 그는 아버지 예불여상처럼 당군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못된 짓을 다하고 다녔다. '오냐, 나라 네년의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두마.' 춘룡은 독하게 내뱉으며 방문을 젖혔다. 이어서 당군 몇 놈이 방 안으로 짓쳐들었다. 겁에 질린 나선과 나라가 뒷걸음질치며 방구석으로 쫓기고 있을 때 벌써 눈이 충혈된 당군 두 놈이 와락 달려들었다. "악!" 나선과 나라는 숨이 끊어질 듯 소리를 내지르더니 그만 혼절을 해버렸다. 당군 두 놈이 허리춤을 내리고 있을 동안, 나머지 두 놈은 차례를 기다리며 만일을 염려해서 칼을 빼어들고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방 밖에서 얼씬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살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와 칼을 빼들고 서 있는 당군 두 놈의 등짝에 날카로운 것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끄르르륵." "끄르륵." 다음은 민첩하게 나선과 나라를 깔고 있는 두 놈에게 덤벼들었다. "솰라 솰라." 뒤돌아보며 무어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두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러나 춘룡은 뒷일이 걱정되었던지 잽싸게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네 명의 당군을 단숨에 해치운 젊은이는 소형 명림수기의 둘째 아들 조상, 다른 젊은이는 바로 케르부 소형 자미의 아들 자모였다. 조상과 자모는 자소의 둘째 딸 나선과 막내딸 나라와 혼약을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조상과 자모는 펴라성을 떠날 때부터 약혼자인 자소의 두 딸을 줄곧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이다. 이윽고 정신이 든 나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당신은 조상." "쉿, 조용히 해." 두 젊은이는 소녀들을 데리고 행군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라군 파수병들 사이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나선과 나라를 다른 여자 막사로 밀어 넣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포로 호송 책임자인 김인문은 당군 네 놈이 살해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길길이 뛰었다. "어느 놈의 소행인지 당장 붙잡아 능지처참을 하라." 그러나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포로 가운데서 범인을 색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범인이 쉽사리 잡히지 않자 김인문은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당군 네 명을 죽인 대가로 고구려 남자 포로 100명을 죽여라." 이른바 보복 살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소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중죄인으로 끌려가는 처지이지만 죄없는 동포 100명이 죽임을 당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소는 김인문에게 면회 신청을 했다. "뭐? 자소가 나를 만나자 한다고? 건방진 놈 같으니, 못 만난다고 해." 자소는 말을 전하려고 온 아장 홍원은 연방 머리를 굽실거리며 김인문의 말을 자소에게 전했다. 자소도 하는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의 결심을 김인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홍원은 다시 김인문에게로 갔다. "자소는 부장 각하가 만나 주지 않으면 자결을 하겠다고 합니다." "뭐, 자결을 한다구?" "분명 그렇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깐 놈이 자결이든 뭐든 해보라지..." 김인문도 처음에는 코방귀를 뀌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황제의 명으로 특별 경호를 하고 있는 중죄인이 자결을 한다면 호송 책임자인 자기에게 문책이 돌아올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김인문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소를 불러오게 했다. 자소가 나타나자 김인문은 처음부터 위압적으로 나왔다. "자소, 나를 만나자고 했다구?" "그렇소."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말이 너무나 심하오!" 예기치 않은 자소의 무겁고 위엄있는 말에 내심 뜨끔해진 김인문은 슬쩍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 "이세적 장군을 만나게 해주시오." 김인문은 기가 찼다. "요동도대총관겸 안무대사 이세적 장군 각하를?" "그렇소, 당신은 내 상대가 아니오." 순간 김인문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쳐죽일 놈을 봤나. 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느냐!" 그러나 자소의 대답은 한결같이 침착했다. "죽이든 말든 그런 것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으면, 그것이 당신 소행임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들어 알 것이오." "어허! 역시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그리고 내가 요행히도 당신 손에 죽지 않고 장안까지 간다면 당신이 한 짓거리를 낱낱이 당나라 임금에게 말하겠소." 김인문은 당나라 황제의 비위를 건드리면 자기의 신상에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갑자기 김인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소 장군, 대총관 각하를 꼭 만나야만 되겠소?" "그렇소. 그러나 만나더라도 당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을테니 그 점은 안심하시오." "..." 이렇게 되자 자소는 이세적을 만날 수가 있었다. 자소를 본 이세적은 대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소 장군, 고생이 많지요. 그대가 포로의 신분이라서 나로서도 어쩔 수도 없는 처사였소." "이세적 장군,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내 장안에 도착하면 틀림없이 천자께 아뢰어 자소 장군을 곤궁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소." "후의는 고맙소만 그것 때문에 만나자는 것은 아니오." "그러면?" "장군에게 한 가지 청이 있어 찾아왔소." "어서 말해 보오." "고구려의 백성들이 비록 포로로 붙들려 가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신들과 같이 생명이 있는 인간이오." 이세적은 자소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귀측의 군사들이 매일 밤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또 신라군은 멋대로 포로들을 죽이려 하오. 이것은 분명 중국의 천자도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오." 자소의 말을 들은 이세적은 부끄럽게 생각했다. "자소 장군, 그런 일이라면 크게 염려하지 마시오. 내 당장 엄한 명령을 내리겠소." 그때 이후 당군의 겁탈과 신라 호송병의 행패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사이 포로들의 행렬이 압록책을 지나 요동벌에 들어섰다. 자소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눈길을 헤치며 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행렬이 길게 뻗쳐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고 걸리고 하며 남부여대해서 북으로 가는 행렬은 다름 아닌 고구려 백성들이었다. 당군과 신라군의 등쌀에 견디다 못 한 고구려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남쪽은 신라, 서쪽은 당나라 땅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고, 사람이 살고 있는 신천지를 찾아가자니 자연히 발걸음이 북으로 향했던 것이다. 당신 고구려의 북쪽은 돌궐과 말갈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라도 목숨을 연명해야만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니 고구려는 끝장이구나!" 유랑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자소는 장탄식을 했지만 중죄인으로 끌려가는 자신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압록책에서부터는 확 트인 요동벌이 시작되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허허벌판을 걷고 또 걸었다. 꼭두새벽부터 하루 종일을 걷다가 해질 무렵 조그만 성을 만나면 그곳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잤다. 이렇게 연일 행군이 계속되었다. 당군이나 포로들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지치고 군기도 느슨하게 풀려갔다. 압록책에서 20여 일을 걸어온지라 며칠만 더 가면 백암성에 도착할 무렵, 군중에 갑자기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군과 포로들은 한번 걸리기만 하면 고열이 나고, 설사와 구토를 하며 정신을 잃고 앓아 누웠다. 당군은 하는 수가 없었던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성에 남겨 두고 당군 본대와 건강한 포로들만이 먼저 앞서 나갔다. 전염병에 걸리면 10명 중 8,9명은 목숨을 잃었는데 마지막 숨이 넘어가면서 내뱉은 포로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아-, 어머니!" 고향 하늘 아래 두고 온 어머니를, 두고 온 산하 고구려의 대지를 부르며 마지막 숨을 놓았다. 환자가 죽고 나면 다른 포로들이 시체를 거적으로 둘둘 말아서 언 땅을 파고 묻었다. 자소의 두 딸 나선과 나라도 환자를 돌보느라 여러 날 밤을 설쳤다. 그러던 어느 날 자소의 둘째 딸 나선이 덜컥 병에 전염되어 쓰러졌다. "언니! 언니!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나라는 고열로 신음하는 나선을 붙들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버지 자소를 끌고 가는 선발대는 벌써 신성에 도착하여 3일째 후속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조상과 자모가 이들 자매 곁에 늘 함께 있어 주었다. 다음날 나선의 병세는 다소 좋아지는 듯하더니 해질 무렵 갑자기 사지가 굳어지면서 숨을 거두었다. 나선이 숨을 거두면서 들릴 듯 말듯 토해낸 말도 역시 '어머니'였다. 나선은 죽어서 혼백이나마 매일 남편과 자식들이 떠나간 서녘 하늘을 보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어머니 초혜와 나싸의 곁으로 되돌아갔을까. 그러나 나선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어린 나라의 가슴은 도려내듯 아팠다. "언니! 언니! 나만 혼자 두고 죽으면 어떻게 해. 나도 데리고 가줘..." 자모와 조상이 나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한사코 발버둥치는 나라를 겨우 떼어 놓았다. 나라 못지 않게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나선의 약혼자인 조상이었다. 조상도 맥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날 따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조상과 조모는 이제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자모는 나라에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라, 이제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도 없어..." 나라는 말없이 눈물어린 시선으로 자모를 바라보았다. "함께 이곳을 떠나자." "어디로?" "고구려로 되돌아가는 거다." 그러나 나라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자모,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니? 왜 갈 수가 없다는 거야?" "나는 아버지를 보살펴 드려야 해." "..." "원한다면 혼자서라도 떠나라구." 나라는 이제 열 여섯 살이었지만 이미 어린애가 아니었다. 나라의 말을 듣고 자모는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자모도 곧 결심을 굳혔다. "조상, 너만 가거라." "아니, 자모 너는?" "나라 곁에 남기로 했어." 곁에서 이 말을 들은 나라는 눈물겹도록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자모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자모, 너는 되돌아가야 해. 어쩌면 이것이 너에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 앞으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남겠다는 것은..." 자모가 자기의 결심을 확인하듯 힘을 주어 말했다. "뭐랄까... 나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느껴지는구나." 다음날 자모와 나라는 뒤처진 다른 포로들 틈에 끼어 백암성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그들은 남쪽 성벽 가까이에 젊은이의 시체 하나가 마침 내리는 흰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름 아닌 조상이었다. 전날 밤 성벽을 혼자서 뛰어넘다가 신라병에게 발각되어 그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한편 선발대에 끼어 있던 자소 일행은 백암성에서 며칠간의 여독을 풀었다. 다음날 포로들은 고구려 최전방의 건안성으로 향했다. 지평선만이 보이는 요동벌의 허허로운 황톳길을 열흘남짓 걸어 건안성에 도착했다. 건안성은 규모도 크고 튼튼해 옛날부터 고구려를 지키는 전략 요충지였다. 건안성에 도착하던 날 밤, 주먹밥 한 덩어리로 저녁을 때우고 나자 을불수, 온상덕, 고문간이 은밀히 자소 곁으로 다가왔다. 오골성을 떠난 이후로는 인가도 드물고 길도 험해 신라 호송병들은 자소 일행을 묶었던 오랏줄을 풀어 주어 행동하기가 한결 자유로운 상태였다. "자소 장군, 이곳이 고구려 땅이 끝나는 곳입니다." 자소도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말하는 뜻은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가보아야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기로 도망해서 나라를 회복합시다." 온상덕과 을불수는 자소에게 마지막 간청을 넣어 보았다. 그러나 자소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온 장군! 을불 장군! 그럼 붙잡혀 가는 저 20여만 명의 우리 백성들은 이제 누구를 의지하겠소?" "그래도 먼저 나라를 되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내 일찍이 들으니 나라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나라는 없다고 들었소." "..." "이렇게 합시다. 나는 백성들과 함께 갈 테니 세 분 장군들은 이 곳을 빠져 나가 나라를 되살리는데 진력을 다해 주시오." "자소 장군!" 마주보는 세 사람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뜨거운 눈물이 주름이 팬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그날 밤 야음을 틈타 온상덕, 을불수, 고문간은 수비병 두 놈을 죽이고 성벽을 타고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날 아침,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당군측에서는 행군 도중에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었고, 또 온상덕과 을불수가 보장왕, 남건, 자소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다음해 2월 3일. 당군의 산발대가 건안성에거 다시 우북평을 향해 길을 떠났다. 건안성과 우북평 사이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완충지대여서 가도가도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다 며칠째 눈이 내려서 벌판은 수렁이 되어 걷기가 더욱 힘들었다.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행군이 16일 동안 계속된 연후에야 당나라의 최전방 전초기지인 우북평에 도착했다. 그사이 고구려 포로 20여만 명 중 2만여 명이 병들거나 지쳐서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 우북평에 도착한 고구려 포로들은 우선 지친 몸을 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북평을 비롯한 어양, 상곡, 탁군 등 북중국 일대는 전대 모본왕이 점령을 했었고, 그 후 태조대왕 때느 아예 10성을 쌓아 우리 영토로 만들었던 곳인데 훗날 다시 중국에 빼앗겨 버린 곳이다. 그래서 우북평에 다다른 고구려 포로들의 가슴속에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 한족들이 중국에서 많이 이주해 와서 어느덧 풍물도 다르고, 의복도 다르고, 말씨마저 달라 고구려 포로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딴 나라에 붙잡혀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포로들이 성문에 들어섰을 때는 걸치고 있는 옷들이 그새 누더기가 되었고, 그 누더기마저 해어져 군데군데 맨살이 드러났다. 거기다가 못 먹고 지쳐서 머리와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은 광대뼈가 앙상하게 튀어나오고 그 위에 땟 국물까지 한 겹 덮고 있었다. 우북평에서는 고구려 포로들이 붙잡혀 온다는 소문이 벌써 나돌았는지 거리마다 구경나온 당나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방 지껄여 댔다. "솰라, 솰라, 솰라..." 고구려 포로들은 흡사 거지떼 같은 몰골로 그들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고구려 포로 하나가 돌연 길바닥에 쓰러졌다. 구경꾼 하나가 다가와서 일부러 밀어 버렸던 것이다. 고구려 포로가 힘없어 언 땅 위로 넘어지자, 운집해 있던 구경꾼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쓰러졌던 고구려 포로가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그 구경꾼은 심술궂게 달려들어 또다시 밀어 넘어뜨렸다. 군중 속에서 웃음소리가 또 한번 터져 나왔다. "와 하 하." 두 번씩이나 쓰러졌던 포로가 주저앉은 채 자기를 쓰러뜨린 중국인을 쏘아보았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여섯모꼴 얼굴의 그 젊은 중국인은 고구려 포로의 얼굴 위에 침을 뱉었다. "못된 놈의 가우리(고구려인)!"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자 포로들이 지나갈 때는 중국인들은 주먹질을 해가며 갖은 욕설과 음담패설을 쏟아 냈다. "갈보년들, 하룻밤 얼마냐?" 욕설로는 호기심을 채울 수 없었던지 건달패로 보이는 몇 놈이 불쑥 나오더니 여자들의 젖가슴을 더듬으려 하기도 하고, 또 갑자기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겨 여자의 엉덩이와 치부가 드러나게 하기도 했다. 여자 포로들은 수치스러운 나머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조무래기 아이들마저 고구려 포로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욕설을 해댔다. "가우리놈들 지나간다. 골통을 까부시자!" "개 같은 자식들! 똥이나 처먹어라!"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지탱해 가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고구려 포로들은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벌써 여기저기서 포로들이 돌멩이에 맞아 머리통이나 어깻죽지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도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끌려가는 고구려 포로들에게는 애당초 인권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처럼 갖은 수모를 당하건만 곁에서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일도 없었다. 어디를 가나 고구려 포로들은 중국인들에게 개돼지보다도 더 천하고 추한 대접을 받았다. 우북평에서 묵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고구려 포로들은 몸을 더 이상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진해 있었다. 그때 한떼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어구구... 나 죽네." "차라리 죽여다오." 그래도 신라 호송병들이 휘두르는 채찍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개 패듯 두들겨 맞은 고구려 포로들은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는 인간인지라 그래도 그 순간만은 모면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밖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고구려 포로 중 노약자 2천여 명은 전날 밤 누워 있던 자리에서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우북평에거 숨을 놓았다. 살아서 움직이는 고구려 포로들의 행렬은 다시 탁군을 향해 이어졌다. 두고 온 산하 고구려 땅과는 달리 북중국은 가도가도 끝니 없는 평원이었다. 산 하나 언덕 하나 없이 종일토록 걸어도 지평선만이 보이는 황톳길이었다. 빈사 상태로 걸음만 옮겨 놓다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쓰러진 사람 곁을 지나가면서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못했다. 모두들 극도로 탈진한 상태라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체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고 흙 몇 줌이라도 끼얹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컹 컹!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송아지만한 들개떼들이 우북평에서부터 고구려 포로들의 행렬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행렬을 따르다 누군가 쓰러지면 들개 몇 마리가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쏜살같이 달려와 시체를 물고 달아났다. 그리고 서로 으르렁대며 아직도 체온이 채 식지 않은 시체를 찢어 발기고는 내장부터 씹어 먹었다. 주둥이에 피칠을 한 들개 떼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 주면 다음 독수리 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와 뼈마디 사이에 남은 살점마저 쪼아먹어, 시체는 순식간에 하얀 뼈로 변해 황토 먼지 속에서 뒹굴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가 십 년 같은 초죽음의 행진이 끝나면 포로들은 성읍에 들어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다. 성읍에 사는 중국인들이 큰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몰려와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고 돌을 던졌지만 이제 포로들은 분노를 나타낼 기력조차 없었다. 여자 포로들은 여자로 태어난 까닭에 더한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성읍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몇십 명씩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지방 수령들과 토호들의 수청을 드는 것이었다. 당군과 신라 호송병들은 수령들과 토호들에게 술잔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그들에게 잘보여야 했으므로 을 포로 여인들을 끌어다가 그들의 노리개로 던져 주었다. 여자 포로들은 처음에는 수치심으로 콱 목이라도 매달고 싶었지만 좁쌀 몇 되라도 얻어 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으로 가족들의 주린 창자를 채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얼마쯤 지나자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을 우선 살리겠다고 생각한 여자 포로들은 자진해서 따라나서기까지 했다. 우북평을 출발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자모와 함께 걷던 나라가 쓰러졌다. 나라의 가녀린 몸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라가 눈꺼풀을 위로 치켜 뜨고 사지를 떨자, 자모가 와락 달려들어 나라의 몸을 흔들었다. "나라! 나라!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그러나 나라에게서는 더 이상의 대답소리가 없었다. 그제야 자모도 나라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는 급히 사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은밀하게 동지로 규합해 둔 젊은이들 몇 명과 함께 갈대를 걷어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토기그릇에다 물을 데워 나라의 입 속으로 연방 떠 넣었다. 한참 후에야 나라가 실눈을 떴다. "자모..." "나라!" "나 아주 깊은 꿈을 꾸었어..." "나라!" "여기서 그냥 살고 싶어." "날, 여기서는 안 돼. 그러면 죽는 거야." "자모, 난 괜찮아. 이젠 너만 가는 거야. 그리고 우리의 원수를 갚는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해." "이상하다니?" "글쎄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네가 가는 곳마다 너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갈 수가 있을 것 같거든." "나라! 힘을 내자. 나는 언제나 네 곁을 떠나지 않아." "그럼. 너도 죽게돼." "물론 나도 그때는 너와 함께 죽는다." 그사이 나라도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자모의 말을 듣고서 살며시 쳐든 나라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듯 슬픈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모, 죽지 마. 나도 죽지 않을 거야." "나라, 난 네가 죽으면 나도 함께 따라 죽으려고 했다." 원기를 다소 회복한 나라의 입에서는 한 맺힌 말이 쏟아져 나왔다. "너는 바보야. 죽긴 왜 죽어? 우리가 밤마다 맹세하던 말들을 벌써 잊었어? 우리가 죽으면 누가 우리 민족이 당한 이 원통하고 처절한 원한을 달래 주겠어? ...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겠어." "그게 뭔데? 어서 말해 봐." "응, 이것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인데... 너는 죽어서는 안 돼. 네가 살아 있어야만 혹시 내가 먼저 죽더라도 너의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 있잖아." 나라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소녀다운 정감이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라의 몸도 점차 회복되어 평상시처럼 생기가 돌았다. 자모느 나라를 들쳐 업고 행렬의 뒤를 따랐다. 자모와 나라가 떠난 자리에 눈이 내리고, 타나 남은 모닥불에서 파르스름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이윽고 흩날리는 눈발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 한편 중국땅 우북평에서부터 다시 함거에 갇혀 호송되어 가던 자소는 고려진에 이르자 감회가 한층 깊었다. 알고 보면 탁군을 포함한 북중국 일대가 대대로 고구려의 땅이었다. 고려 진도 지금은 당나라에 예속되어 있지만 600년 전 태조 무열제가 쌓은 성이었다. 자소는 문득 옛일이 떠올라 마음이 울적했다. 고구려 포로들은 다음날 고려진을 떠나 드디어 북평성에 당도했다. 북평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째 되는 날, 당군은 처음으로 인원 점검을 했다. 무려 4만 2천여 명이 도중에 굶주림과 전염병과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당군 대총관 이세적도 많은 포로들이 행군 도중에 목숨을 잃자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무리한 행군을 계속하면 장안에 이르기 전에 모든 고구려 포로들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비록 개선장군으로 환국하는 처지이지만 옥에 티를 남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포로들을 잘못 간수한 데 대한 당고종의 문책이 뒤따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떡한다? 황제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해동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를 수도 없고..." 이세적은 장수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뾰족한 계책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북평에서 장안까지는 아직도 3천리나 되는 먼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못 먹고 지쳐서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포로들을 더 이상 걷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영제거와 광퉁거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 두 운하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필요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전국에서 탁군으로 집결시키기 위해서 온 국력을 쏟아 608년에 완성시킨 것이다. 연 인원 수천만 명을 동원해 만든 수양버들을 두줄 세줄로 연이어 심어 놓아 한껏 운치를 돋우고 있었다. 영제거는 상건수가에 있는 탁군에서 남쪽으로 2천 리 가깝게 뻗어 황하 중류에 있는 판자에 이르고, 다시 판자로부터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륙 쪽으로 1천 리를 올라가면 당나라 서울 장안 조금 못 미처 대흥에 이르는데, 이곳을 광퉁거라고 불렀다. 이 운하 위로는 수시로 용선이라는 큰 배가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이 용선은 길이가 50미터가 넘고 2층, 3층의 구조로 되어 있어 많은 물자와 인력을 먼 곳까지 용이하게 수송할 수가 있었다. 수십 척의 용선들이 이제는 물자가 아니고 고구려 포로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세적은 장안까지 끌고 가야 할 포로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로 20여만 가운데서 가조과 함께 붙들려 온 3만여 명은 통제거를 이용해서 남쪽으로 보냈다. 바로 이들이 강회남(황하의 회강 사이)으로 끌려간 포로들이었다. 망국의 한을 품고 2월 25일 아침. 용선들은 나머지 10만여 명의 고구려 포로들을 가득 태우고 줄지어 황하를 따라 내려갔다. 춘삼월이 코앞인지라 동남풍이 거세게 불어 배는 돛이 찢어질 듯이 바람을 안으며 황톳물 위를 매끄러져 갔다. 뱃전 위에 콩나물 시루처럼 포개 앉은 고구려 포로들은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고, 배멀미까지 해댔지만 그래도 진종일 걷는 것보다는 견디기가 한결 나았다. 포로들은 점심도 굶고 하루종일 배를 타고 가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강가의 성읍의 찾아가 촌가에 분산되어 잠을 잤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신라 호송병들의 극심한 학대가 많이 누그러져 전보다 지내기가 훨씬 자유스러워졌다. 중국 사람들 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건 신라 사람들이건 모두 똑같은 오랑캐로 보여 그들에게서 멸시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서 남이 갈수록 신라 호송병들과 고구려 포로들 살이에는 중국인들에게 똑같이 천대를 받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신라 호송병들은 당나라 땅 우북평에 도착할 때까지 만 해도 자기들이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으스대며 거리를 활보했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해 주기는 커녕 욕설을 퍼붓기가 일쑤였다. 중국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다니는 신라 병사들을 향해 예사로 침을 뱉고 몰매질 해대 곳곳에서 적잖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후로는 신라 병사들이 주눅이 들어 문밖 출입도 삼가고 결국 그들도 포로 아닌 포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제서야 고구려 포로들과 신라 호송병 사이에는 기묘한 우정, 즉 같은 고향 하늘 밑에서 왔다는 동류 의식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탁군에서 배를 타고 떠난 지 4일 째 되는 날 해질 무렵, 배는 황하 중류에 있는 대명이라는 조그만 포구에 닻을 내렸다. 여느날처럼 신라 호송군과 고구려 포로들이 배에서 물으로 내리는데 당군 몇 놈이 작당을 해서 신라 호송군들을 개패듯이 두들기고 있었다. 주먹으로 맞고 발로 짓이겨 신라군 몇 명이 벌써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평소에 상전으로 대하던 당군이라서 대항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만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신라놈아, 어디다 대고 함부로 말대꾸야." "저런 변방의 야만인들은 모조리 씨를 말려야 돼." 사연인즉 이랬다. 배 위에서 하루종일 무료한 당군 감독관 몇 놈이 대낮부터 술을 쳐먹었다. 낮술에 얼근해진 당군들은 주사를 부리고 싶은 심술이 났는데 마침 신라 호송군 두 명이 그 앞을 지나갔다. "어이! 신라군, 대감들이 노는 앞을 왜 함부로 지나다녀?" 그런데 신라 호송병 한 명이 그만 말대꾸를 해버린 것이다. "볼일이 있어 지나다니는 것도 죄요?" 이어서 함께 술을 마시던 당군들이 박차고 일어났다. "신라놈들 꺼져라." "죽여라, 죽여!" 평소에 자기들의 종보다도 못하게 여겼던 신라병들이 같은 연합군이라고해서 제 분수를 모르고 맞먹으려는 데 비위가 상했던 당군들은 이때다 싶었던지 벌레처럼 덤벼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당군들은 제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있었고 신라병 두명은 잽싸게 고구려 포로들 사이로 숨어 버려 당장의 화는 면했다. 그러나 당군들은 배가 포구에 닿자 작당을 하고, 신라병들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당군들은 신라병을 보자마자 우르르 달려들어 무턱대고 두들겨 팼다. 신라병 열서너 명이 얼마나 얻어맞았던지 그 중에서 대여섯 명이 땅바닥에 뻗어 버렸다. 신라병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는데도 당군들은 계속 얼굴이며 가슴팍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다. 차마 눈뜨고 쳐다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때 한 젊은이가 구경하고 있는 포로들 사이를 헤치고 불쑥 당군 앞에 나타났다. 바로 신라 호송병들에게 모진 학대를 받으며 여기까지 끌려온 고구려 포로 자모였다. "당군, 당신들 너무 심하지 않소. 이제 그만들 하시오." "뭣이 어째? 너는 또 누구냐?" "나는 고구려인으로 자모라는 사람이오." "허 허 ... 고구려 사람이라. 포로 주제에 우리 보고 하라 마라 명령을 해?" 붙잡혀 가는 주제에 말참견을 하니까 당군들도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순간 자모의 눈두덩이에 불 같은 것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당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자모를 쥐어패기 시작했다. 자모도 대항을 했다. 그러나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자모 혼자서 여러 명의 당군을 상대하기는 힘에 부쳤다. 그래서 당군들은 삽시간에 자모를 거꾸러뜨리고 자기들에게 대항했던 자모를 아주 죽여 버릴 듯이 독기를 뿜으며 두들겨 팼다. 그런데 난데없이 군중 속에서 비단 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요! 안돼!" 뜻하지 않은 비명소리에 흠칙 놀란 군중들은 다음 순간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아!' 하고 낮게 탄성을 질렀다. 열 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당군에게 달려들어 종아리를 물면서 발버둥쳐 댔다. 나라였다. 종아리를 물어뜯긴 당군이 나라를 힘껏 걷어차자 나라는 저 건너에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한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군중 속을 헤집고 나오더니 자모를 두들겨 패고 있는 당군들을 간단없이 때려눕혀 버렸다. 이들은 펴라성에서 이곳까지 끌려오는 동안 자모와 뜻이 맞아 한 동아리가 된 목사구, 을지사영, 고일상, 여을수 등의 동지들이었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포로들 가슴속에도 무엇인가 뜨겁게 복받쳐 오르는 것이 있었다. 펴라성이 함락된 후 포로가 되어 개돼지같이 끌려오면서 침묵만 지켜오던 포로들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중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 우-." "우- 우- 우-.이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야말로 그때까지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던 민족의 피맺힌 울분을 처음으로 토해내는 절규였다. "우- 우-." "우- 우- 우-." 고구려 포로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울림이 되어 계속 주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군의 지휘부는 깜짝 놀라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수만 명의 고구려 포로들의 험악한 공기를 눈치채고는 더 이상 자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판단했던지 쓰러져 있는 당군들을 들쳐업고 돌아가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군과 고구려 포로 사이에는 새로운 변화가 왔다. 그제서야 신라군은 자기네들이 고구려를 무너뜨린 개선군이 아니고, 같은 동족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자책이 들었다. 신라군들은 고구려 포로들에게 그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죄했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같은 민족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우쳤소." 그러나 고구려 포로들은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우리는 벌써 당신들을 용서했소. 그래도 동족에게 학대를 받아 왔으니까 참을 수 있었지... 만약 당군이었다면 벌서 끝장이 났을 것이오." 그날 밤 자모와 나라는 처음으로 이국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란히 누웠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나라가 씻기고 닦아 냈지만 신라군의 편역을 들다가 몰매를 맞은 자모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라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많이 아프지?" "아니, 이젠 괜찮아." "아파도 참아. 곧 나을 것야." "괜히 네 걱정까지 시키는 구나." "아니야, 우리 별이나 쳐다보자. 어느 별이 엄마 별일까..." "엄마 별도 다 있니?" "그래, 우리가 지금 저 별들을 쳐다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듯이 지금쯤 펴라성에 있는 엄마도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우리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 아냐?" "지금 너는 그 엄마 별을 찾아 헤매는구나." 그때 처음으로 따스한 손길이 자모의 손에 와 닿았다. 자모는 끌리듯 손을 마주 쥐었다. 그리고 서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나라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자모 쪽으로 돌아 누웠다. "자모 너만 괜찮다면 이제부터 내가 너의 누이도 되어 주고, 엄마도 되어 주고 싶어." "..."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줄 거야." "난, 난..." 자모의 오른 팔이 나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라, 이젠 어떤 일이 닥쳐와도 걱정할 것 없어. 이제부터 너와 나는 함게 있을 테니까. 네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다음날 아침, 대명 포구를 떠나가는 포로 수송선 갑판 위에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졌다. 한 고구려 포로 젊은이와 나이 어린 처녀 한 명이 배의 선미 쪽에 나란히 서서 지평선 위로 돋기 시작하는 해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끌려가는 포로 신세라 두 사람은 이렇게 단둘이서 결혼식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라와 자모의 마음속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의 의지로 가득 찼다. 대명 포구 사건 이후, 신라 호송병들이 고구려 포로들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 쪽은 포로, 다른 쪽은 호송병, 그러나 그들은 피지배 관계를 넘어서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감싸 주었다. 뒤늦게나마 민족의 화해를 하고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요동도행군부대총관의 직첩을 받고 이세적의 지휘를 받으며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조력을 다한 신라의 김인문의 뒤늦게 당군의 신라병 구타 소식을 듣고는 당군 대총관 이세적을 찾아갔다. "각하, 대명 포구 사건은 유감입니다." "대명 포구 사건이라뇨?" 이세적은 짐짓 딴전을 피웠다. "아무 잘못이 없는 신라병을 당군이 구타한다면 신라병의 사기는 크게 저하될 것입니다." "뭐 대수롭지도 않은 조그만 일을 가지고 그러시오." 이세적은 뜬금 없이 이번 사건과 상관도 없는 원천적인 문제를 끄집어 냈다. "우리는 신라가 매번 사절을 보내와 백제와 고구려를 쳐 없애 달라고 하기에 수백만 명의 군삳르을 동워하여 당신들을 구원해 주었지 않았소?" 김인문은 기가 막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전조 선덕여왕 시절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수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애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신라측에서도 전쟁을 하는 동안 비록 당나라의 지휘 통솔은 받았지만 온 국력을 다해 힘껏 싸웠다. 그런데도 이세적의 말투에는 분명 주종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김인문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때까지 신라의 왕 이하 모든 사람들은 당나라가 신라를 좋아하고 불쌍히 여겨 이번 전쟁을 전 국력을 쏟아 가며 대신 치러주었다고 고맙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당나라의 참전이 신라의 요청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순전히 구실에 불과했고, 실은 신라의 힘을 빌려 자기들보다 더 강한 고구려를 쳐 없애고 드넓은 요동땅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자는 목적이었음이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도 막강한 고구려가 당나라와 정면에서 힘을 맞겨루고 있을 때는 그 틈바구니에서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부를 차지하고 명색이나마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젠 고구려라는 버팀목이 무너져 버린 이상 당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김인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제 와서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장탄식을 쏟아 놓았지만 이미 일을 그르치고 난 뒤였다. 김인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당나라 독단으로 전후 처리를 할 때, 신라 지역은 경주에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여 아주 당나라 지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신라왕은 독립국의 상징인 연호를 사용 할 수 없도록 강제했다. 그때부터 천여 년 동안을 중국의 변방에 있는 속국이나 다름없는 지위로 전락했던 것이다. 고구려 포로들을 가득 실은 배들은 그 후로도 10여 일 황하를 거슬러 올라갔다. 동관을 지날 때는 주위가 아름다웠다. 특히 해질 무렵에는 노을이 불게 타올라 천지가 하나로 합해져 몽롱한 꿈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황홀감이 들었지만, 당나라 서울 장안을 지척에 둔 고구려 포로들의 마음들의 마음은 붉게 타는 노을 만큼이나 불안했다. 그날 한낮이 조금 지나 고구려 포로들을 태운 배는 탁군으로부터 27일간의 긴 항해를 끝내고 당나라 서울 장안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대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안까지는 불과 70리 길, 범선으로 하루가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이곳 대흥길. 범선으로 하루가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이곳 대흥은 장안을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다. 따라서 어느 군대든 일단은 대흥에 머물러 천자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비로소 장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세적은 대흥에 도착하자마자 그간의 내용을 소상히 적은 표문을 당고종에게 보내 그의 허락을 기다렸다. 고구려 포로들과 신라 호송병들도 마침내 작별의 순간이 왔다. 그들은 지난날 동족이면서도 원수가 되어 서로를 죽이면서 처절하게 싸웠지만 그때쯤 분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대명 포구에서 대흥에 이르는 한 달 동안 신라군은 고구려 포로들을 기약 없는 이별을 목전에 둔 형제나 부모처럼 대했다. 자기네들은 주리면서도 양식을 가져다 나누어 주고, 혹시 환자라도 생기면 밤을 세워 간호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날도 포로 수송선단이 목적지 대흥 나루터에 닿자 끝이 왔다. 이곳부터는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호송병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겠지만 고구려 포로들은 또 어딘가로 끌려가야 할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대흥 나루터 언덕 위에는 줄지어 서 있는 수양버들이 봄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막 움트는 연초록의 버들가지들이 강물 위로 휘휘청청 늘어져 한껏 운치가 있었다. 그 밑에서 때 아닌 진풍경이 벌어졌다. 고구려 포로들과 신라 호송병들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이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병사들은 자기네의 옷 보퉁이와 양식 자루를 들고 와 포로들에게 건네며 서로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너희들도 돌아가는 길에 춥고 배고플 텐데..." "아니다. 우리들은 조금만 참으면 된다. 어디로 가든지 살아 있거라." 또 조금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의 피골이 상접한 고구려 포로들이 구렛나룻이 텁수룩한 신라 호송군 한 명을 에워싸고 울먹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펴라성에 들르거든 늙은 우리 부모님께 이 돌쇠가 살아 있다고 전해다오." "집이 어디지?" "응, 서문 밖 수리골 정자나무 앞 초가집이야." 코맹맹이 소리에 이어 곰보자국의 젊은 포로 하나가 눈시울을 붉히며 구렛나룻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마을 꽃분이더러 내 삼 년 안에 못 돌아가면 마음 고쳐 먹으라고 일러줘." "암, 내가 꼭 전해 주마." 작별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자 주변의 분위기도 점차 다르게 바뀌어 갔다. 한동안 왁자하게 떠들던 소리가 점차 가라 앉으면서 대신 이곳 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다. 이제 고구려 포로들과 신라 호송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울음을 깨물고 있었다. 때마침 하루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붉은 햇살이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들어와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이때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던 무거운 분위기를 일시에 깨는 벽력 같은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개 같은 동이족 종자들아!" 언제 나타났는지 고구려 포로들을 인수하기 위해 모여든 당군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였다. 뒤이어 버드나무 숲은 일세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구려 포로들은 당군들이 후려치는 채찍을 맞으며 도열을 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신라 호송군들은 고구려 포로들이 버드나무 ㅆ을 돌아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마침내 당고종으로부터 답신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 당나라의 조치는 빈틈이 없었다. 1. 고구려 원정군은 행군대총관 이세적이 직접 지휘하여 장안성 동문 밖 30리 지점에 있는 사가정으로 이동하여 머문다. 2. 고구려와 이하 대신들을 모두 결박하여 장안성 북문 밖에 있는 소릉에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린 다음 승전곡을 울린다. 다음, 다시 장안성내 대묘에 이들을 끌고 가서 고구려국 정벌을 고한다. 3. 3월 28일 장안성내 함원전에서 당고종에게 포로들을 인계한다. 4. 신라 호송군과 고구려 일반 포로들의 장안성내 출입을 일체 금지한다. 당시 당나라 서울 장안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고구려 포로들을 감당할 숙박 시설도 부족했지만 당나라측에서 더욱 우려했던 것은 그 많은 숫자의 고구려 포로들의 성내로 들어와 일시에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큰 변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포로들이 사가정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이세적은 고구려 보장왕 이하 소형 이상의 관료 264명과 주악대를 대동하고 소릉으로 갔다. 소릉은 당왕 18릉 중 정릉(선종묘)과 함께 가장 큰 규모의 능이다. 곧 인시성 전투에서 눈알이 빠져 그로 인해 죽은 당태종 이세민의 묘였다. 장안성에서 멀지 않은 위수 북쪽 건현과 포성현 사이에 있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왕이 죽어서도 묘지 속에서 생시와 같이 생활한다고 믿어서 산 속에 엄청난 규모의 굴을 파고 지하궁전을 만들어서 그 안에다 시체를 안치했다. 그래서 태종이 묻힌 후에도 능침 앞에 태종의 자태가 몽롱히 나타났다느니 또 침궁 속에서 당태종의 헛기침을 들렸다느니 하는 요괴서러운 헛소문이 떠돌았다. 하여튼 보장왕 등 264명은 당나라의 병사들에게 이끌려 위수를 건넸다. 그리고 구서산 꼭대기를 향해 뚫린 길을 따라 올라가니 외곽을 쌓은 성이 나타났다. 성벽 위에는 소릉을 지키는 병사들이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고구려 포로들은 남쪽에 있는 주작문을 통해 들어섰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대궐이 앞을 가로막아섰다. 건물은 지은지 얼마 안 되는 듯싶었지만 세상과는 먼 유현한 장소여서 귀기스러웠다. 이곳이 바로 당태종의 능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헌전으로 중요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구려 포로들은 당군이 시키는 대로 이 헌전 뜰 앞에 도열해서 무릎을 꿇었다. 고구려 포로들을 붙잡아다가 무릎을 꿇리고는 죽은 당태종에게 승전을 알리는 의식을 거행하려는 것이었다. 자소는 그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이민족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당장 혀라도 깨물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라 온몸이 열에 들떴다. 바로 그때 그의 결심을 순간적으로 바꿔 놓을 만한 무엇인가가 설핏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뭘까?' 헌전 좌우에는 석상들이 도열해 있었다. 석상은 모두 14개로 주인공들은 모두 당나라에 공로가 있는 이웃나라의 왕들이었다. 당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당나라에 협조한 토번의 송찬강보, 당나라에 나라를 바친 투루판의 고창국왕 국지성... 그리고 유달리 눈에 띄는 여자 석상이 한 개 있었는데 다름 아닌 신라의 선덕여왕이었다. 당나라는 선덕여왕이 죽자 개부의동삼사라는 당나라 최고의 벼슬을 내리고 비단 300필을 주었다. 그리고 소릉에 그녀의 석상을 만들어 죽어서도 당태종을 호위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다음대 진덕여왕은 백제를 쳐부셔 달라고 일국의 왕이라는 체통도 없이 손수 비단에 수를 놓아 김춘추의 아들 법민(문무왕)을 통해 당태종에게 바친 일도 있었다. 당태종은 진덕여왕의 시를 받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신으로 온 법민에게 대부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아무튼 선덕여왕의 석상을 본 자소는 수치감이 부글부글 굻어 올랐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모질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이윽고 보장왕과 고구려 군신들이 무릎을 꿇자 그 앞에서 주악대가 요란스럽게 승전곡을 울려 댔다. 당군의 주악대가 흥에 겨워 한식경이나 북과 징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는 앞에서 결박 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보장왕인들 어찌 나라를 잃어버린 데 대한 일말의 감회조차 없었겠는가. '아! 내가 정녕 잘못을 저질렀구나. 당나라의 멸시보다는 내 민족인 막리지의 폭정이 그래도 더 나았던 것을 ...' 보장왕의 두 눈에서 오랫동안 참아 왔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우매한 보장왕의 심사가 이럴진대 하물며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자소의 울분은 어떠했을까. 삼월달 찬 땅위에 꿇어앉아 있는 자소의 주위는 분노에 달아오른 열기로 딸이 질퍽하게 녹았다. '어떻게든 이 치욕을 갚아 주리라. 그날이 오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목숨을 부지해야만 한다.' 보장왕과 함께 맨 앞줄에 꿇어 앉은 남건과 남산 형제도 시종 고개를 수그린 채 당군의 주악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당군의 승전곡이 끝났다. 그때까지 소릉 앞에 꿇어 앉아 있던 고구려 군신들은 무릎이 땅에 얼어 붙어 혼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군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이들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끝내 일어나지 못한 고구려 포로 한 사람이 있었다. 여든이 넘어 기력이 다한 주느부 대인 안승강이었다. 안승강은 당나라 군사들이 어거지로 잡아끌자 몸을 반쯤 곧추세웠다가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목구멍에서는 연방 가래 끊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어렴풋이 말 한마디를 뱉었다. "모두 우리 탓이다. 나는 이제 펴라성으로 되돌아간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거적에 말린 안승강의 시신은 장안성에서 파견 나온 검시관의 확인 절차를 거친 후 간단한 장례의식도 없이 장안서 서문 밖의 언 땅에 묻혔다. 한편 소릉에서 곤욕을 치른 고구려 군신 포로들은 다시 줄줄이 묶여 장안성으로 끌려갔다. 자소가 보아도 장안성은 펴라성에 비해 규모가 엄청났다. 성은 두께가 30자(9미터)도 넘어 보였고 군데군데 성문이 13개나 되었다. 마침내 포로들은 장안성 남쪽 중앙에 있는 명덕문을 거쳐 장안성내에 들어섰다. 그들의 앞에는 길 폭이 500자(150미터)도 넘는 주작대로가 곧장 뻗어 있었다. 그리고 주작대로 막다른 곳에 궁궐이 있었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구경 나온 백성들이 길을 메우고, 지난번 안시와 펴라성 수성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이 삿대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지만 포로들은 앞만 보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당시에도 중국은 세계 제일의 인구를 가진 대국으로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람들을 불러다 노역을 시킬 수가 있었다. 또 당왕은 자칭 천자라 하여 한껏 위엄을 부리느라 온 국력을 쏟아 거창한 토목공사를 예사로 일으켰다. 그래서 길거리 양편으로 누각같이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포로들의 다음 행선지는 당고종이 지시한 대표, 그곳에서 고구려 군신들은 또 무릎이 꿇려진 채 전날 소릉에서 당했던 것과 같은 치욕을 한 번 더 당했다. 당군은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며 승전에 대한 고축사를 잃어 내려갔다. 삼가 영전에 고하나니, 이번에 선대로부터 우리를 괴롭혀온 동이족 고굴려를 멸망 시켰나이다.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심이요, 천자의 위엄이요, 자손만대의 영광이로소이다. 이로써 대당은 드디어 사해를 정복하였은즉 억조창생이 발 뻗고 태평가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대묘에서의 승전 행사가 끝난 다음 고구려 군신 포로들은 장안성 한 귀퉁이에 있는 임시 수용소로 끌려가 유폐되었다. 그해 3월 28일. 예정대로 고구려 포로들이 당고종에게 인계되는 날이었다. 그 날은 봄 날씨치고는 제법 쌀쌀하여 아침나절 잠깐 햇살이 휘날리더니 정오 무렵에는 때아닌 가랑비로 변하고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당시 당나라 서울 장안성은 25개의 큰 길이 있었고 109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장안성 중앙의 가장 큰 길인 주작대로를 따라가면 주작문이 나오고 이어서 황성과 왕이 거처하는 태극궁에 이른다. 그런데 함원전은 태극궁과 앞뒤로 이어져 있어 고구려 포로들은 황성을 통해서 갈 수가 없었으므로 장안성 북쪽에 있는 광화문을 통해 성밖으로 끌려나간 후 다시 함원전의 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함원전의 넓은 뜰은 이날 천자인 당고종의 특별한 행차가 있다고 해서 꼭두새벽부터 온통 쓸고 닦고 또 색색의 영기를 곳곳에 꽂아 놓아 궁궐 전체를 흡사 커다란 꽃상여처럼 단장해 놓았다. 이날 오시, 고구려 군신 포로들은 함원전 앞뜰에 또다시 무릎을 꿇리는 신세가 되었다. 포로들 주위에는 창검과 기치가 현란한 당군이 도열했다. 한 식경쯤 지났을까. 갑자기 고각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함원전 큰 문이 좌우로 열렸다. 금색 곤룡포를 입은 당고종이 좌우에 문무백관들을 거느리며 함원전으로 들어와 단하에 꿇어 엎드린 고구려 포로들과 당군 사이를 지나 전각으로 올랐다. 당고종은 얼핏 보기에 키는 작고 얼굴빛은 검었으나 젊어서부터 잔병 치레를 많이 했는지 빼빼 말르고 선병질적으로 보였다. 뒤이어 이세적이 열에서 나와 포로 명부인 듯 싶은 서책을 두 손으로 받들고 당고종 앞에 엎드린 자세로 복명을 하기 시작했다. "요동도행군대총관겸 안무대사 신 이세적은 천자께 복명합니다. 신 등 당군 104만 명이 천자의 명을 받아 거년 3월 20일 탁현에서 발진하여..." 백발이 성성한 당군 총사령관 이세적은 그간에 있었던 전쟁 상황을 낱낱이 전각에 앉아 있는 당고종에게 보고했다. 함원전 뜰 앞에 있는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 즉 당나라 군사들과 고구려 포로들이 한 장소에 있었건만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가운데 이세적의 쉰 듯한 목소리만이 홀로 전각 안을 울렸다. "... 마침내 9월 5일 펴라성에 입성하여 구려와 보장 이하 대신 183인과 구려 병사 3만 4천, 백성 20만 5천 명을 묶어... 3월 25일과 26일에 소릉과 대표에서 각각 승전곡을 울리고..." 한식경이나 계속되던 이세적의 보고는 고구려 군신 포로들의 이름과 직책을 나열한 다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엎드린 채 게걸음으로 당고종의 발 밑까지 기어가서 보고서를 헌상하는 것이었다. 당고종은 거만한 몸짓으로 한 손을 뻗어 이세적의 보고서를 받아 옆에 시립하고 있는 환관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판에 박은 듯한 어투로 이세적 이하 고구려 정벌군의 노고를 치하했다. "수고했소. 팔순이 넘은 노장군이 오로지 우국충정으로 수만 리 먼길까지 수고롭다 아니하고 출정하여 예로부터 우리 중국을 괴롭혀온 구려(중국인들이 고구려를 하대해서 부르는 이름)의 근원을 말살하였으니 이는 실로 삼황오제 이래 그 아무도 이루지 못한 큰 위엄이며..." 당고종은 치사를 끝내고 포로를 접견했다. 맨 먼저 당고종 앞으로 끌려나간 사람은 보장왕이었다. 온몸을 오랏줄로 결박당하고 머리는 풀어 헤쳐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대가 구려와 보장인가?" "예." 보장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짐이 좋은 말로 수차례나 타이른 바 있었거늘 그대는 어찌해 밖으로는 이웃 신라를 모살게 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는가?" "..." "그대는 또다시 나를 거역하고 반기를 들 텐가?"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때나 승자는 정의의 편이고 패자는 불의였다. 승자는 자기 논리대로 할말을 다하나 패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결박을 당한 채 끌려온 처지에 항복한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한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 차례는 당연히 막리지, 대대로, 대로, 대인 등의 벼슬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당고종의 호통소리에 주눅이 들어 그 앞에서 잘못을 빌었다. 한동안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더니 이윽고 대형 자소 차례가 되었다. "오호라. 그대가 유명한 고구려 자소 장군인가?" "그렇소." 순간 자소는 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두 눈이 형형히 빛났지만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대는 내 아버지 태종대왕을 죽게 하고, 왕예, 장소, 강행본 등의 장수를 베었소." "..." 당고종은 자소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했다. "거기다가 그대 때문에 안시성 전투 이래 우리 당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년간 걸쳐 전비를 대느라 나라 안의 온 백성들이 허리띠를 졸라 맸소." "..."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터인즉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앞으로 고구려 군신들을 면대할 때와는 달리 당고종이 유별나게 관심을 가지고 준엄하면서도 신랄한 문책을 하자 함원전 뜰 앞에 도열해 있던 당나라 문무백관과 호송 군사들, 그리고 고구려 포로들조차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한 사람은 승리자요, 한 사람은 패자로서 그 앞에 결박당한 채 꿇어 엎드린 처지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두 거인의 대결은 묘하게도 주위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윽고 자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나라 사람들이 당나라를 위해 싸웠듯이 나도 고구려 사람인 이상 고구려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을 뿐이오." "과연 듣던 대로 그대는 범상치 않은 장수구려. 그러나 당나라 법도대로 그대는 마땅히 죽어야 할 터인즉 그래도 여한이 없는가?" "없소. 저 용렬한 보장과 미련한 연씨 형제들로 인해 천년사직이 무너졌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군신지간이라는 낡은 관습에 얽매어 일찍이 그들을 제압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오. 그러나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미 각오하고 있으니 어서 나를 죽이시오. 죽어서 혼백이라도 고향 땅으로 빨리 되돌아가고 싶소." 다른 고구려 군신 포로들처럼 목숨을 구걸하리라고 기대했던 당고종은 조금 머쓱한 눈치더니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한마디를 자소에게 던졌다. "그대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오. 만약 그대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이곳에 남아서 일할 생각이 있소?" "고구려를 위하는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과연 그대는 변방의 일개 장수지만 참으로 훌륭하오. 우리 당나라 장수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내 차마 그대를 죽이지 못하겠소." 이어 당하에서 읍하고 있던 총사령 이세적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세적 장군, 이 당나라 안에는 저만큼 무예와 충의를 함께 갖춘 장수가 없소. 자소 장군을 마땅히 예로써 대접하시오." 그날 오로지 자소만이 당고종 앞에서 결박당한 오랏줄이 풀렸다. 함원전의 포로 인수식은 그날 유시가 되어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끝났다. 고구려 군신 포로들은 임시 막사로 끌려가 유폐되고 기약도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소는 뜻밖에도 고구려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군신 포로들의 식사 등 자질구레한 잡일을 시키기 위해 고관들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던 고구려 사람을 차출해다가 일을 시켰다. 이들은 안시성 전투 이후 고구려를 침공할 때마다 고구려에서 닥치는 대로 붙잡아온 고구려 백성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고구려 포로들과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한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어느 날 밤 자소가 변소를 가는데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자소의 팔을 끌어당겼다. "누구냐?" "쉿, 자소 장군,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 "고구려 사람입니다." "..." "고구려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요." "난리가?" "검모잠과 고문간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당군과 싸우고, 또..." 자소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으나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중상, 대조영 장군이 압록현에서 당군을 치고 있습니다요." 자소는 하도 기쁘고 놀라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려 오며 저절로 감격의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 오! 이것은 분명코 가므님(하느님)의 도우심이다. 가므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이 소식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분명치는 않았으나 사가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일반 포로들에게도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포로들은 너도나도 벌떡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며 소리를 질러 댔다. "만세! 만세!""고구려 만세!" 망했던 고구려가 다시 되살아나고 이제 모두가 당나라의 혹독한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순식간에 포로들을 휩싸 버렸다. 그러나 고구려 포로들이 끝내 몰랐지만, 그들을 그토록 흥분시켰던 검모잠, 안승의 부흥 운동은 2년도 안 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건모잠은 어리석게도 그래도 신라는 같은 민족이니 자기들을 도와 주겠지 생각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성들을 동정하는 체하면서 도리어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고구려 영토도 아닌 금마저(전북 익산)로 유폐시키고 허울좋은 고구려왕으로 봉했다. 그래서 고구려의 독립운동은 신라에 의해서 그 불씨마저 꺼져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내막을 알 리 없는 고구려 포로들은 들떠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뿔싸! 이러다가 큰일나겠구나!' 소란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자모는 급히 동지들을 불러 흥분에 들떠 있는 고구려 포로들을 진정시키는 데 한동안 애를 먹었다. 설사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포로들이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당군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소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중국인의 핍박과 학대 속에서 차츰 민족의식에 눈을 뜬 고구려 포로들에게 이 소식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다. 또 포로들 전부를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고구려 포로들은 우선 조직을 결성했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라 자모가 총책임자가 되고 목사구, 고일사, 을지사영, 명림수기, 황보수림, 여을수 등이 자모를 돕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포로들 사이에 질서와 규율을 세우는 일, 고구려인으로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 그리고 온갖 외부 정보의 전달이었다. 물론 자모의 아내가 된 나라는 여자 포로들을 담당했다. 또 포로 생활 중에 남자와 맺어진 몇몇 고구려 여인들인 황보수림의 아내 진여, 고일상의 아내 나혜와 안승강의 외손녀 유화, 고구려 국내현에서 붙잡혀 온 나숙 등이 나라를 도와 여자 포로들을 돌보아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포로들 모두의 가슴속에는 아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자신감이 솟아났다. 비록 며칠이 안 되어 부풀어오르던 자신감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또 다시 절망 속으로 주저앉아 버렸지만. 그즈음 마침내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 보장왕은 고구려의 정사가 그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 참작되어 사평대상백원외동정의 벼슬을 내리고, 대로 남산은 일찍 항복한 공로가 인정된다 하여 사재소경을 삼았다. 또 펴라성문을 활짝 열어 당군을 맞아들인 중 신성은 은청광록대부,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쫓겨 당나라에 투항한 후 길잡이 노릇을 한 남생에게 우위대장군의 직책을 주었다. 그 외에 고구려를 망하게 한 간신배 예불여상은 홍로경, 뜻밖에도 자소에게 좌무위 대장군의 직함을 내렸다. 안시성 싸움에서부터 펴라성 수성전에 이르기까지 당군을 가장 괴롭혔던 자소는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도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높은 벼슬을 준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자소가 고구려 백성들의 믿음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어 고구려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지만, 자소를 구슬려 이용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물론 남생과 자소의 직책 이외에는 명색이 높은 직위일 뿐 실은 허수아비 자리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오직 막리지 남건만은 끝까지 항거했다 하여 검주로 귀양을 보냈다. 어쨌든 겉으로는 서계 전쟁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전쟁 포로에 대한 후한 대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거지 벼슬을 내린 지 며칠이 안 되어 자소에게만 조회에 참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자소는 칭병을 하고 당나라 조정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나라는 이제 나머지 10만여 명의 고구려 일반 포로들을 처분할 차례였다. 그러나 포로의 주축인 일반 포로들에게 내린 당나라의 처사는 고구려 벼슬아치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 앞에는 목숨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혹독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못 올 1만 리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 포로 3만 명을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강회남으로 보내 버렸지만, 장안까지 끌고 온 나머지 10여만 명의 고구려 일반 포로들의 처리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한군데 모여 살게 하자니 필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그렇다고 고구려로 되돌려보낼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만약 포로들을 되돌려보낸다면 이들이 가까운 장래에 또다시 고구려를 동방의 강국으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일반 포로에 대해서 회의를 거듭하고 묘책을 궁리한 끝에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고구려 일반 포로에 대한 혹독한 처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미혼의 처녀는 문무백관들의 처첩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던 홀아비 병사들에게 준다. 2. 미혼의 총각들은 관청이나 사대부 집안의 노예로 삼는다. 3. 노약자와 미성년자는 경서 지방의 오지로 보내 집단 거주케 한다. 4. 건강하고 생활력 있는 기혼자는 모두 서남쪽 변경 지대인 산남의 무인지경으로 보내 황무지를 개척케 한다. 1-3항까지는 모두 예상했던 조처였다. 그러나 고구려 청장년들을 중국 서남부 지방의 황무지에 집단 이주시킨다는 4항의 조처는 뜻밖이었다. 고구려 포로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청장년들을 고구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서남부 변방으로 쫓아내 화근의 뿌리를 애초에 없애려는 당나라 조정의 계략이 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가정의 고구려 포로들은 기가 막혔다. 모처럼 한 덩어리로 굳게 뭉쳤는데 또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다니! 일반 포로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있던 자모와 나라도 그들의 계획이 일시에 무너짐을 느끼고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아! 하늘이 우리를 또 한번 버리는구나..." "여보, 그래도 힘을 내요." "이제 다시는 고구려에 돌아갈 수 없을는지는 몰라..." "..." 당나라에서는 포로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따로 몇 사람을 비밀리에 불러다 사탕발림 벼슬을 주고는 포로 속에 섞여들게 했다. 이자들 중에는 예불여상의 아들 춘룡도 끼어 있었다. 그해 4월 말경 어느 이른 아침. 한떼의 당병이 불시에 고구려 포로 막사로 들이닥치더니 포로들을 구분해서 정렬시켰다. 그러고는 막사 밖으로 내몰았다. 이렇게해서 고구려 포로들은 제 갈 길로 나뉘어 사가정을 떠났다. 고구려 포로 중 6만 명은 장안과 다른 큰 도시로 보내졌다. 이들은 고구려 처녀와 젊은 남자들이어서 강제로 당나라 관리들과 병사들에게 처첩으로 주거나 노예로 판다는 소문이 금방 나돌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구려 여인들은 끌려가면서도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 여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더러는 고관집에서 첩살이를 하다가 표독한 주인 마누라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당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종내는 술집이나 매음굴에서 죽어 갔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운이 좋은 여인들은 중국 사람들의 씨를 받아 자식을 낳고 살다가 먼 이국땅에서 뼈를 묻었으리라. 노약자 3만 8천여 명은 장안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경서로 끌려갔다. 많은 수가 병들거나 굶어 죽었고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운좋게 살아 남아 그 지방의 유목민이었던 강인들 틈에 끼어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고구려 포로 중 젊은 기혼자 4만 2천 명은 당나라 조정의 명령대로 장안에서 2천여 리가 되는 산남으로 끌려갔다. 사실 펴라성에서 포로가 되어 올 때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당나라 장안까지의 멀고 험난한 길을 끌려왔지만 사가정에서 머무는 동안 점차 민족의식이 싹터 새로운 용기와 희망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고구려 포로들이 단결하자 당군도 고구려 포로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장안성에서 하릴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자소가 고구려 포로들이 사가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다음날 아침, 자소는 부랴부랴 간의대부 저수량의 집을 찾아갔다. 저수량은 평민에서 간의대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당대 제일의 문인이며 저술가여서 자소도 다른 당나라 조정대신과는 달리 보고 있던 터였다. 그는 당나라 조정에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할 때 유일하게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저수량은 자소가 찾아온 연유를 미리 짐작하고는 좀처럼 만나주지를 않았다. 자소는 아예 저수량의 집 앞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8일째 되는 날 해질 무렵에야 저수량을 만날 수 있었다. "좌상, 나를 산남으로 보내 주시오." "산남으로 가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왜? 장안이 싫어졌소? 이 세상에 장안만큼 살기 좋은 곳은 없소. 산남은 궁벽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오."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고구려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갔다는데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소. 가서 그들을 돌봐 주려는 것이오." "알겠소. 자소 장군이 정 가기를 원한다면 내 천자께 상주해 보리다." 다음날 당나라 조정에서는 자소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신하들은 하나같이 자소는 당나라에 충성할 사람도 아니고 그와 같은 인물을 장안에 두었다가는 장안에서 종노릇하는 고구려 포로들을 충동질해 무슨 일을 꾸밀지도 모르니 차라리 귀양보내는 셈치고 산남으로 멀찍이 격리시켜 버리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당고종이 자소에게 좋은 집과 비단금포를 주는 등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는 것에 심사가 뒤틀린 조정의 신하들과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소의 산남행을 찬성하고 나서는 바람에 쉽게 결말이 난 것이다. 다음날 자소는 당고종에게서 받았던 물건들을 고스란히 숙소에 놓아 두고 말 세 필과 종자 두 사람을 데리고 장안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고구려 포로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 양자강 상류에 있는 익주를 향해 종일토록 말에 채찍질을 해댔다. 그때쯤 먼저 길을 떠난 고구려 포로들 사이에는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발생하고 있었다. 고구려 포로들이 단결을 해서 다루기가 힘들어지자 호송을 맡은 당구은 이춘룡(예불여상은 아예 성마저 예씨에서 중국성 이씨로 바꾸어 버렸다) 일당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렸다. 헛소문은 금세 효과가 있었다. 흥분을 한 고구려 포로들은 둘만 모여도 의견이 분분했다. "뭐? 우리가 1년 안에 고구려로 다시 돌아간다구?" "글쎄 말이야. 어떻게든지 그때까지만 꾹 참고 견디면 다시 좋은 세상을 만나겠지." "그것이 참말일까?" "어제 저녁 당군 사령이 그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고구려 포로들은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고향 땅에 다시 돌아 갈 수 있다니까 금방 마음이 들떠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모 등의 지도자들이 귀찮게 여겨졌다. 단결을 호소하는 등 자기들을 규율하는 집행부가 오히려 불안한 존재로 비쳐졌던 것이다. "저 친구들 말야. 이제 그만 설쳐 대고 속 차려야지." "아무렴, 저렇게 섣불리 까불다가 당나라 비위라도 거스리는 날이면..." "우리들까지 신세 조질지도 몰라." 날이 갈수록 세상 경험이 적은 자모 등이 집행부와 일반 포로들 사이는 점차 서먹해져 갔다. 자모 등 집행부는 포로들을 설득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여러분! 당군의 이간질에 속지 맙시다. 당군은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오." 자모 등은 포로들을 상대로 설득했으나 고향 땅을 밟는다는 감언에 이미 속아넘어간 포로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일반 포로들은 공연히 당나라의 비위를 건드려 자기들에게 화가 미칠까 봐 오히려 역정을 냈다. "집행부 나리들! 도대체 뭘 믿고 꼴사납게 설치시오?" "정신 차립시다. 지금 당나라는 우리들을 남방 황무지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1년 안에 고구려로 보내 준다는 말은 우리들을 이간시켜 힘을 약하게 만든 다음 자기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게 하려는 새빨간 거짓말이오." "허허, 거짓말이라구?" "물론이오." "집행부 나리들은 그렇게도 머리가 안 돌아가오? 당나라는 보장왕과 대대로 남산에게까지도 높은 벼슬을 주었는데 우리같이 죄 없는 백성들을 귀양보내겠소?" "그러면 어째서 우리들을 멀고 먼 남쪽 변방으로 끌고 가는 것이겠소?" "그것은 1년 동안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지 않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러 말 말고 잠자코 있으시오. 괜히 죄없는 우리까지 다치게 하지 말고..." 당나라 호송군들은 자기들의 계책이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자 한술 더 떠서 아주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 당군은 다시 한 번 이춘룡과 소서상달을 얼러 댔다. 소서상달이란 자는 펴라성에서 연씨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간신 연개수오, 고혜상, 고산수의 아장으로 있었던 자로서 간특하고 교활한 재주가 이춘룡과 막상막사였다. "춘룡 장군, 고구려 포로들이 앞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킨다면 우린 조정에 장군의 일을 다 보고할 수 밖에 없소." 즉 쥐꼬리만한 벼슬을 파면시켜 버리겠다는 위협이었다. 고구려 포로 호송군의 책임자인 당중랑장 사부치가 잔뜩 겁을 주자 두 사람의 안색이 싹 변했다. "사 장군,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 기회에 이 장군과 소서 장군이 아예 고구려 포로들의 두목이 되시오." 춘룡과 소서상달은 군침을 삼켰다. "내 조정에 상주해 두 장군에게 중랑장 벼슬에 봉하도록 손써 보리다." "승진을요? 아니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그런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 안타깝소." "예? 그럼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요?" "그 전에 두 장군이 해주어야 할 일이 있소." "그, 그게 뭣입니까?" "잠깐..." 당군의 책임자 사부치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춘룡과 소서상달의 귀에다 한참을 소곤거렸다. "예, 잘 알겠습니다요." 다음날 고구려 포로들 사이에는 해괴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른 아침부터 고구려 포로들은 삼삼오오 떼지어 쑥덕거렸다. "뭐! 자모가 우리들의 왕이 되려고 한다구?" "그러게 말야. 사가정에서부터 뭔가 수상쩍었잖아." "그래, 맞다 맞어.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더니 그런 꿍꿍이속이 있었구먼." "만약 자모가 왕이 된다면 우리들이 다시 고향 땅을 밟아 보겠어?" "그렇게 되어선 안 되지, 절대로 안 돼!" 그때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소서상달이었다. "자모에게로 가자. 가서 물어 보자." "아니야. 그런 놈들은 아주 족쳐야 돼." 군중심리란 게 참으로 묘해서 고구려 포로들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모가 있는 집행부 막사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모 일행도 아침부터 고구려 포로들의 거동이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만 명의 포로들이 집행부로 성난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입이 딱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앞장서서 달려온 무리들이 자모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폭언을 퍼부어 댔다. "자모! 네가 왕이 되고 싶어 우리들을 선동했지?" "너나 되놈 땅에서 뒈져라. 우리들은 고구려로 돌아간다." "저런 놈은 아예 죽여 버려야 돼." 성난 군중들이 고구려 포로 조직의 집행부 사람들을 둘러싸고 갖은 욕설을 다 퍼붓는데도 어쩐 일인지 당군의 호송병들은 약속이나 한 듯 코끝도 뵈지 않았다. "여러분! 나는 ... 맹세코 왕이 되려고 한 적도 없고."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자모의 목소리는 군중들의 아우성에 묻혀 자꾸만 끊어졌다. "오직 당군들의 모진 학대에 대항하기 위해..." 그러나 이성을 잃은 군중들의 귀에는 자모의 피맺힌 외침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때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코밑에 개수염을 꼬아붙인 춘룡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이제 그만들 진정하시오." 갑자기 나타난 춘룡이 소리치자 군중들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여 잠잠해졌다. "알다시피 당군은 우리가 1년간 황무지를 개척하면 다시 고구려로 보내 주기로 약속을 했소." "옳소, 옳소." 이곳 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모두들 당군이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나 순순히 따릅시다." "좋소, 좋소." 결국 춘룡과 소서상달 등이 포로들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자모, 황보수림, 목사구, 여을수, 을지사영 등은 온몸이 새끼줄로 꽁꽁 묶여 포로들의 포로가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고구려 포로들은 자모 등 그들의 포로들을 앞세우고 서남쪽을 향해 행군해 갔다. 그해 6월 20일. 고구려 포로들은 무주를 거쳐 장강을 건너서 곧바로 익주로 들어갔다. 중국 대륙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펴라성에서 장안까지 붙잡혀갈 때는 추위 때문에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받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서는 기후가 점차 따뜻해졌다. 때가 어느덧 6월이라 한낮으로는 무더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날씨가 찌는 듯했다. 또 주위의 풍경도 확연히 달랐다. 요동 벌판을 거쳐 황하에 이르기까지는 끝없는 황토 벌판이었는데 이윽고 양자강을 건너자 들과 산에는 활엽수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황대나무 숲들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무주를 지나고부터 포로들은 낮게 드리운 활엽수 가지들과 가시덩굴을 헤치며 행군하느라 모진 고생을 했다. 고구려 포로들이 익주를 출발하던 날 자소는 무주에 닿았고 그 다음날은 장강에 도착했다. 자소는 문득 삼국지의 고사를 떠올랐다. 500여 년 전,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한나라가 국운이 쇠약해지고 위, 촉, 오 세나라가 중국 천하를 삼등분하여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던 무렵, 이곳은 유비의 땅이었다. 유비가 죽고 제갈공명이 여섯 번씩이나 조조를 대적하기 위해 출사를 했던 유서 깊은 장소였다. '아! 내가 살아 생전에 이 강물을 다시 건널 수 있을 것이가.' 자소는 오래도록 감회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앞서 떠난 고구려 포로들을 생각하고 급히 길을 재촉해 말을 몰았다. 자소는 드디어 고구려 폴 행렬을 만난 것은 익주 남쪽 100여 리 지점. 고구려 포로들은 자소의 뜻밖의 출현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듯했다. 자소가 자기들을 찾아 이곳까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 자소 장군님." "끝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포로들은 자소를 보자 말끝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목놓아 울었다. 그간 모진 고생을 한 포로들은 격한 마음이 차츰 진정되자 그간 경위를 털어놓았다. 자소의 입에서 저절로 장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라를 잃은 것도 원통한데 이곳까지 끌려와서도 제정신을 못 차리다니!" 자소는 급히 포로 호송군 책임자인 사부치를 만나 우선 자모 등의 결박을 풀게 하고 당군의 사주를 받아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춘룡과 소서상달을 불렀다. 그러나 춘룡과 소서상달 등은 뜻밖에 자소가 나타나자 자기네들의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들을 따르는 무리 천여 명과 더불어 종적을 감추었다. 사실은 음모가 들통이 날까 봐 두려웠던 당군 호송책임자 사부치가 그들을 빼돌린 것이다. 다음날도 지루한 행군이 계속되었다. 고구려 포로 호송 지점은 익주에서도 동남쪽으로 1500여 리나 떨어진 곳, 드문드문 보이던 인가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고 나무가 울창한 밀림이 나타났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아열대림 속에는 이상한 곤충과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나무 위에서는 원숭이들이 떼로 나타난 이상한 동물들에 놀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면서 울부짖었다. 밤은 밤대로 호랑이, 표범 등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울려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한데서 눈을 붙이는 포로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그러나 지루한 밤이 지나면 붉은 해는 어김없이 솟아 나와 한 낮이면 바로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고, 포로들은 어느덧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렇게 밀림 속을 헤치며 나가는 행군이라 자연 더딜 수밖에 없어 1500리를 가는 데는 한 달여가 걸렸다. 벌써 7월도 지나가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는 점점 더 기승을 부렸다. 아열대 지역에서는 비도 내리지 않는 1년 중 가장 무더운 때라는 것을 북쪽에서 온 고구려 포로들이 알 턱이 없었다. 당군에게 끌려가는 고구려 포로들이 목적지에 닿은 것은 그해 8월 12일. 그리고 고구려 포로들을 절해고도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오지에 가두어 놓았다고 판단한 당군이 돌아간 것은 8월 15일 이었다. 당군은 고구려 포로들에게 무시무시한 포고령을 남겼다. 내용은 고구려 포로들이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벗어나면 가차없이 처형한다는 지극히 삼엄한 것이었다. 사실 당나라 조정에서 고구려의 젊은 포로들을 이처럼 궁벽한 곳에 몰아넣은 것은 이들을 모두 죽이자니 고구려 유민들이 결사항전할 것이고, 살려 두자니 고구려로 도망가서 옛날과 같은 강대국으로 되살아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포로들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에 처박아 놓으면 몇 년 못 가서 이들이 모두 굶어죽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당군이 떠난 지 3일도 안 되어 당군이 생색을 내면서 놓고 간 식량이 바닥났다. 이때부터 고구려 포로들의 생존을 위한 피나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자소 장군! 과연 우리가 여기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항상 자소 곁을 따라다니는 자모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답답하기는 자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는 포로들에게 비관적인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살아 보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차라리...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어떨까요?" "안 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이곳을 탈출해서 당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가보았자 맨주먹밖에 없는 포로들이 당군에게 금방 도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고구려 포로들은 대나무를 베어다 엮어 세우고, 갈대를 잘라다 지붕을 얹어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다음 정글 속을 뒤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열대인 이곳에는 그들이 살았던 고향 땅 어디에나 흔하던 머루며 다래도 없었다. 그들 주위에 야생 바나나이며 파인애플 등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어서 먹을 수 있는 열매인지도 몰랐다. 개울을 찾아가 뒤져 보아도 그 흔한 피래미, 붕어새끼조차 없었다. 구정물같이 흐린 물속엔 뱀처럼 징그럽게 길고 비늘도 없는 황갈색의 장딴지만한 물고기들이 느릿느릿 기어다녔다. 우선 물속에서 사는 것들은 모두 잡아다 주린 배를 채우기로 했다. 또 대나무로 활과 죽창을 만들어 짐승들을 사냥해서 요기를 했다. 그러나 잡아먹을 수 있는 것들은 적고 배를 채워야 할 포로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4만 명이나 되는 포로 중에서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그 중에는 몇 줌의 볍씨를 품속에 넣어 이곳까지 지니고 온 사람이 있었다. 자소는 이 볍씨를 보고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오! 가므님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았구나.' 자소는 급히 개울가에 손바닥만한 논을 일구어 볍씨를 뿌리게 했다. 이럭저럭 지나는 사이 8월 하순경이 되자 날씨가 갑자기 돌변했다. 남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장이 몰려와 온 하늘을 뒤덮더니 이윽고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 여기도 비가 오는 구나." 고구려 포로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비를 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다. 두고 온 산하, 고향 땅에서 내리던 비가 이곳에도 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러 날이 지나도 그치지를 않았다. 천지가 개벽을 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되어도 비는 하루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밀림 속은 진창이 되어 버려 사냥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엄청나게 불어난 냇물에서 물고기도 잡기가 어려워졌다. 고구려 포로들은 눈이 쑥 들어가고 뼈만 앙상해졌다. "여보, 당신에게 짐이 되어 미안해요. 차라리 흑흑..." 어느 날 밤 아기를 밴 나라가 그날 따라 사냥을 나갔다. 빈손으로 돌아온 자모를 향해 꺼져갈 듯 한숨을 토해 냈다. "나라,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포로 수송선 위에서 떠오르는 해님을 향해 맹세했던 말을 벌써 잊었어?" 그들은 단 둘이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함께 있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래도 당신이 너무 가여워요." "나라와 함께 있으니까 나는 그래도 행복해." "내가 없다면 당신이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으련만..." "마찬가지야. 당신이 없는 곳이라면 나도 살고 싶지 않아." 나라는 살가죽만 남아 광대뼈만 튀어나온 자모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심한 영양 결핍으로 뱃속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던 첫 아기는 지루한 우기가 끝나기도 전인 11월 어느 날 사산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극도의 굶주림 상태로 1년을 보내고 나니까 포로의 절반 가량이 영양실조와 돌림병으로 죽었다. 그나마 생명력이 약한 남자 포로들이 열악한 환경에 견디지 못하고 더 많이 죽어 버려 살아 남은 남자 포로들의 숫자는 5천 명이 넘지 못했다. 1년 만에 찾아온 당군 감시대는 고구려 포로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 돌아갔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고구려놈들의 씨가 마를 날도 머지 않았구나.' 다음해도 어려움은 여전했다. 지난해에 논에서 나락 서너 말을 거두었지만 자소는 단 한 톨도 손대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종자로 불리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숲에서 열리는 여러 가지 야생 열매를 먹어 보기도 하고 또 사냥 솜씨도 늘어 전보다는 다소 형편이 아나졌지만 사람의 숫자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어린애는 낳아 보았자 영양실조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년 후에는 고구려 포로 숫자가 1만여 명으로 줄었으며 그중 남자는 겨우 2천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2년을 지내는 동안 그들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고구려와 같은 추운 겨울이 없어 지내기가 한결 편했고, 야생 목화나무가 있어 열매를 따다가 실을 뽑아 의복을 만들어 몸을 가릴 수가 있었다. 고구려 포로들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가던 어느 날, 당군의 감시대가 1년 만에 또 찾아왔다. 포로들의 숫자가 전해보다 훨씬 준데다가 남은 자모도 몰골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으로 2년 안에 고구려 포로들이 모두가 굶어 죽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군들은 바로 저 밀림 끝에 고구려 포로들이 2년 동안이나 굶주려 가면서도 알차게 가꾼 벼이삭들이 황금 물결로 출렁이고 있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다. 당군 감시대가 돌아가던 날 밤, 자소가 살고 있는 대나무집에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분! 우리는 끝내 살아 남았습니다." 젊어서부터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온 자소건만 첫마디부터 목이 메었다. 3년의 긴 세월을 극한 상황에서 기적과도 같이 목숨을 부지한 고구려 포로들의 가슴속에는 지나간 세월의 시공을 뛰어넘어 이제야 온몸에 더운 피가 도는 감동이 일었다. 이제 마흔 여섯이건만 환갑이 지난 노인처럼 늙어 버린 자소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일은 단을 쌓고 솟대를 세웁시다." "..." "그리고 가므님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알립시다." "..." "우리의 고국, 고구려가 할 수 없는 제사를 이젠 우리가 대를 끊지 말고 모십시다." 오랫동안 눌러온 격정을 이기지 못해 자소의 목소리는 띄엄띄엄 한 마디씩 나왔지만 전류가 흐르듯 듣는 사람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비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자소는 좌중을 돌아보며 잠시 침묵을 했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머지 않아 당나라와 또 싸우게 되어." 조용한 가운데 좌중은 흠칫 놀랐다. "당나라는 우리가 잘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 "중국 사람들의 노예로 살지 않으려면 당군과 싸워서 이기는 길밖엔 다른 선택이 없소." 비로소 닥쳐올 일들을 깨달은 지도자들은 그날 밤 늦도록 궁리를 거듭한 끝에 몇몇 사항을 결정했다. 첫째, 고구려 포로들은 3대로 나뉘어 분산 거주한다. 1대는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 살고, 2대는 남쪽으로 100리를 더 내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3대는 2대에서 100리를 더 내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산다. 이 3개 마을은 수시로 연락 협조하고 만일의 사태에 공동 대응한다. 둘째, 남자 15세 이상 40세까지는 모두 군인이 되며 군사 훈련을 실시한다. 셋째, 여자는 초경을 하면 즉시 남자를 얻는다. 넷째, 남자는 홀로된 여자에 한해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 형제나 친척 중 홀로 된 여인을 반드시 아내로 거느려야 한다. 다섯째, 위의 네 가지 결정 사항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며 고구려의 강토를 회복할 때까지 계속한다. 위 다섯 가지의 결정사항을 보면 식량과 생활 환경이 전차 호전되어감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예상되는 당나라의 토벌에 대비하고, 나아가 인구를 시급히 늘려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되찾자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들에겐 10년 아니 100년이 걸려도 좋았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목표는 신앙과 같았다. 자기들 대에 이루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가 이룰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첫걸음을 내디디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날이 꼭 오고야 만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자소가 자나깨나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여전히 풀 수 없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때가 이르러 이곳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해도 그들은 엄청나게 넓은 중국 대륙을 관통해야만 조국 고구려 땅에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과연 당나라를 쳐부수고 만리나 떨어져 있는 고국 땅을 돌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그들은 고구려에서 너무도 먼 곳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포로들이 중국 남부로 호송되어온 지도 어느덧 4년째를 맞았다. 기후도 풍토도 그리고 땅위에 살아 있는 것이면 동물이건 식물이건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8월부터 10월까지는 매일같이 비가 오며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워 벼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4년째부터는 품속에 넣어온 한줌의 볍씨가 엄청나게 불어나 이젠 떡을 해먹고도 남을 만큼 창고에 쌀이 가득 쌓였다. 그들에게는 집채만한 야생 코끼리도, 절구통만한 비단구렁이도, 모가지를 부채살처럼 펴고 사람에게 덤벼드는 맹독성의 코브라도, 또 큰 뿔이 안으로 굽은 진회색의 물소 떼들도 생전 처음보는 것들이었다. 소나무가 자라야 할 산에 들에는 바나나, 망고, 린치, 티크나무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자소는 궁리를 짜내 새끼 코끼리를 길들여 보고, 비단구렁이는 사냥감으로 하고, 물소를 잡아다가 고삐를 매어 사육해 보았다. 또 바나나, 망고, 파파야도 조금씩 시식을 해본 다음 독성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따먹도록 했다. 이렇게 되어 쌀밥을 먹는 것을 빼놓고는 모든 생활이 고구려에서 살던 때와는 딴판으로 바뀌었다. 식생활이 바뀐 만큼 주거생활도 달라졌다. 고구려에서 서민의 집은 대개 진흙을 발라 벽을 만들고 구들을 놓아 방을 만든다. 그리고 아궁이를 구들장과 연결시켜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구들을 데워서 추운 겨울을 난다. 지붕은 갈대나 이엉을 덮어 눈, 비를 막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추위가 없으므로 대나무를 잘라다 엮어서 벽과 방바닥을 만들었다. 우기에는 습기가 차고 독사나 독충 같은 것들이 땅에서 기어올라 오기 때문에 방을 기둥 중간쯤에 만들어 흡사 이층집이나 원두막같은 모양으로 짓고 살아야 했다. 이곳에는 몸치장을 위한 구슬이 없었으므로 구슬대신에 쇳조각을 둥그렇게 오려서 모자나 옷에 주렁주렁 붙이기도 하고 또 목에 걸기도 했다. 아무튼 고구려 포로들은 중국 남부로 끌려와 무인지대에 정착한 지 4년이 지나서야 사람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해지니까 출산도 크게 늘었고 영아 사망률도 떨어져 집집마다 애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제1대 마을은 자소의 곁에서 일을 돕는 자모가, 그리고 제2대 마을은 황보수림이, 제3대의 마을은 여을수가 각각 책임자가 되었다. 고일상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나혜가 제1대 마을에 남아 늙어 가는 자소를 보살폈다. 그사이 고구려 포로 가운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펴라성에서부터 끌려오는 동안 자모와 의기가 투합해서 고구려 포로 조직을 만드는 등 함께 일했던 고일상, 목사구 등은 젊은 나이였는데도 산남으로 온 뒤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다. 또 고구려 국내현에서 온 나숙은 처녀라 해서 장안으로 끌려간 뒤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장안의 노예시장에서는 10 후반의 고구려 여자 포로 값이 가장 비싸서 보통 남자 포로의 3배 값에 팔리고 있었다. 이유인즉 고구려 여자들은 외모가 아름다운데다가 일단 끌려가서 성적으로 제압을 당하면 도망갈 생각을 앓고 아들, 딸 낳고 그런대로 잘 적응해서 살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5년째 되던 해 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가 끝나갈 무렵 당나라 감시대가 고구려 마을로 들이닥쳤다. 눈앞의 모습에 아연실색한 그들은 입을 딱 벌렸다. 지금쯤 고구려 포로들이 전부 굶어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죽기는 커녕 첫눈에 보아도 넉넉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어린애들까지 마을의 공터에 나와 와글거리는 것이 어느 부자마을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허! 괴이한 일이로고..." 당군 감시대장인 당나라 병부상서 소속 별장 이문삼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대뜸 자소를 찾았다. 이문삼은 수인사도 나누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자소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자소 장군, 혹시 우리 중국 사람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도둑질하는 것 아니오?" "결코 그런 일이 없소." "그럼, 뭘 먹고 사시오?" "우리 스스로 일을 해서 먹고 사오." 자소는 이문삼의 건방진 말에 순간 분기가 확 치밀어 올라 왔지만 꾹 눌러 참고 공손히 대답했다. "어디 두고 봅시다. 만약 거짓말을 하면 용서치 않겠소." 이문삼은 자소를 아랫사람으로 낮춰 보고 말로 겁을 주더니 이집 저집을 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군 몇 놈이 어느 집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서는 때마침 갓난애에게 젖을 빨리고 있는 젊은 아낙네를 보자 마자 자기들의 소유물인양 겁탈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자기 젊은 아낙네의 비명소리가 마을의 공기를 찢고 울려퍼졌다. "사람 살류!" 이 소리를 듣자 멀찍어서 당군의 거동을 살피고 있던 고구려 청년들을 피가 뻗쳐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소리가 나는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당군 네 놈이 갓난애는 구석지에 처박아 놓고, 젊은 아낙네의 팔과 두 다리를 붙잡고 한 놈은 아낙네의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발버둥치는 아낙네의 반쯤 벗겨진 치맛자락 사이로 하얀 엉덩이 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구려 청년들은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당군 네놈을 걷어차 쓰러뜨리고는 실신한 놈들을 마당으로 끌어냈다. 뒤이어 마을 이집 저집에 흩어져 있던 당군들이 칼을 빼들고 모여들었고, 고구려 청년들도 어느새 죽창을 꼬나들고 맞섰다. 당군은 300여 명, 그러나 당군을 빙 둘러싼 고구려 청년은 700명이나 되었다. 그때 쇳소리가 같은 고성이 당군 속에서 터져 나왔다. "네 이놈들! 포로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덤벼드느냐. 목숨이 아깝거든 죽창을 놓고 썩 꺼지지 못할까." 그러나 고구려 청년들의 살기 띤 눈초리가 당군들을 노려볼 뿐, 누구 한 사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한판 붙을 기세였다. "너희들 소행을 조정에 알려 도륙을 낼 테니 그리 알아라." 뱀눈에 키는 땅개같이 작고 양쪽 어깨가 떡 벌어진 당군 감시대장 이문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고구려 포로들이 자기의 명령을 무시하고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자 이문삼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속으로 포로들을 아예 도륙 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잔혹한 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돌격! 고구려놈들 씨를 말려라." "단칼에 요절을 내라." 이문삼을 명령이 떨어지자 당군은 갑자기 맹수로 변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이쿠 흑." "아아악." 그러나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은 의외로 고구려 청년들이 아닌 당군들이었다. 당군들은 애당초 매일 자소 밑에서 고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고구려 포로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자소도 이 광경을 언덕 위에서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벌써 뛰어내려 가서 말렸어야 할 자소도 당군 감시대장 이문삼이 준 모욕감 때문에 결말이 어떻게 날 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당군은 1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온 동네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그제서야 자소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언덕 아래로 내려가 싸움을 말렸다. 자소를 보자 살아남은 당군들은 칼을 버리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자소 장군님, 우리가 잘못했으니 그저 목숨만 살려..." "당신네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는 깨우쳤소?" "예, 예... 그저." 그러나 혼이 나간 당군들은 자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도 못 하고 두 손을 머리통 위로 내밀고 엎드려서 싹삭 빌면서 애원했다. "목숨만, 제발 목숨만은..."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 자소는 역겨움이 치밀었다. "이 똥버리지만도 못한 인간들!" 자소는 고구려 청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은 죽일 가치도 없다. 모두 결박을 지워 쫓아내 버려라. 그리고..." 자소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식량을 모조리 빼앗아라. 저들도 배고픔이 어떤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고구려 청년들이 이문삼의 짧은 턱수염을 잡고 동네 밖으로 끌러내자 살아 남은 졸개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동구 밖에서 세끼줄로 당군들을 굴비 두름처럼 엮어 줄을 세워 돌려보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자소는 머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일들이 걱정되었다. 이제 당나라 대군이 보복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몇 달이 지나도록 당군측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고구려 포로들은 뭔가 개운찮은 가운데 다들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물론 당나라 조정에서 산남의 고구려 포로들을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단지 북쪽 돌궐과의 전쟁으로 병력이 모자라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이 보인다 6년째 되는 해 설을 맞았다. 자소가 황보수림의 제2대 마을에서 설을 쇨 차례였다. 자소는 매년 한 마을씩 돌아가면서 설을 쇳던 것이다. 그해도 포로들은 고구려에서 살 때처럼 떡도 만들고 술도 빚어 소도 안에서 큰 제사 동맹을 지낸 다음 그네도 타고 춤도 추며 흥겹게 놀았다. 밤이 되자 풍물패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을 밟아 주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불이야! 불이야!" 동시에 마을 주변이 갑자기 환해져 왔다. 가만히 살펴보니 마을 주변의 정글 속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은 마을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타 들어왔다. 그때 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한밤중에 누가 부는지 처량한 음률의 피리 소리가 북쪽 산등성이에서 들려 왔다. "아차, 큰일 났구나!" 자소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쳐 가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당군이 마을 가까이 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질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소의 다음 명령은 신속했다. "부녀자들은 황보수림의 인솔하에 급히 피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도망쳐라. 만나는 곳은 제3대 마을이다." 그리고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제2대는 온 마을에 즉시 불을 지른 후 황보수림을 뒤따른다. 그리고 제3대는 북쪽 산등성이에서 불을 피워 놓고 놀다가 새벽녘에 제3대 마을로 철수한다." 촌각을 다투는 절박한 순간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간 정글 속에서 훈련을 받아온 마을 사람들이라 행동이 민첩했다. 우선 마을에 불을 질렀다. 다음 부녀자들을 끌고 북쪽산을 올랐다. 산중턱에 다다를 즈음 온 마을이 새빨간 불길 속에 타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황보수림이 부녀자를 끌고 피리 소리가 나는 북쪽 산등성이에 거진 다 올랐는데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피리를 불고 있던 당군 몇 놈들은 고구려의 대부대가 하필이면 자기들 쪽으로 올라오자 혼쭐이 빠지게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 포로들이 남쪽으로 도망칠 것으로 예상하고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치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당군들은 난데없이 마을에서 불길이 치솟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어, 이게 무슨 변고냐..." 대군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당나라 거기장군 조진은 눈앞에서 마을이 타고 있는 광경을 바라다보고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다는 감이 잡혔다. 만약 이 순간을 놓치면...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군사들을 몰아 일시에 마을을 덮쳤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길에 지붕이 내려 앉고 있을 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차! 속았구나." 조진이 발을 구르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눈을 들어 보라보니 분명 당군이 피리를 불고 있어야 할 북쪽 산등성이에 난데없는 불꽃이 부였고,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흥겹게 놀고 있는 고구려 포로들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이 마을에 자소가 있다. 까딱하면 그의 휼계에 빠지겠구나." 조진의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조진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 군사들을 급히 한군데로 모았다. 방진(물고기 비늘 모양, 군사들을 여기 무더기로 나누어 밀집시켜서 사면을 방어하는 진법)을 치게 하고는 뜬눈으로 그날 밤을 지새웠다. 당나라 조정에서 여러 장수 중 특별히 지략을 겸비한 조진에게 3만 명의 대군을 주어 고구려 포로들을 토벌하게 한 데는 상당한 준비가 있었다. 포로 감시대 120여 명이 고구려 포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가자 당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부리나게 조정회의가 열렸다. "무엇이라고? 고구려 포로들이 우리 군사를 120명이나 학살했다고?" "그러하옵니다." 간의대부 저수량의 대답이었다. "거참, 해괴한 일이로다. 고구려 포로들이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 당고종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그것이..." 자소를 포로들을 따라 산남으로 보내 화근을 없애자고 진언했던 간의대부 저수량은 자신에게 그 잘못이 있는지라 대답을 더듬거리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좌상의 어물거리는 태도가 마땅치 않았던지 대신 방현령이 반열에서 나와 당고종을 안심시켰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군사 3천 명이면 그까짓 조무래기 고구려 포로 몇 놈이야 며칠 내로 소탕해 버릴 것입니다." 대신의 말이 끝나자 고구려전에 참전했던 장손무기가 덩달아 나섰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산남까지 가는 데 한 달, 오는 데 한 달, 단 두 달이면 고구려놈들을 모조리 생포해다 바치겠습니다." 당고종은 신중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소가 있지 않소?" 자소라는 이름을 듣자 고구려전에서 자소에게 망신을 당했던 장수들이 이제야말로 자기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토벌을 자원하고 나섰다. "저를 보내주시면 무인지경의 밀림 속에 들어 있는 자소쯤이야 낭중취물하여 끌고 오겠습니다." 고구려전에서 자소에게 혼쭐이 난 바 있는 이도종이 특유의 허풍을 떨며 출진할 것을 자원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당고종은 머리 속에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무인지경의 밀림 속에 있는 자소라... 내가 자소를 머리 귀양살이 보낸 것이 아니고 밀림 속의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구나.' 밀림 속이니 아무리 많은 대군을 끌고 간다 하더라도 군사 작전이 이롭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지략과 무용이 당대에 적수가 없는 자소가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고종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도 밀림 속에 들어가서 자소를 대적할 수가 없소." 그제서야 당내에 있는 백관들도 어렵풋이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시일을 끌어가면서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나 마침 그 무렵 북쪽의 돌궐이 침입해 와서 온 병력을 그쪽으로 쏟는 바람에 고구려 포로 정벌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시일을 끌면 끌수록 자소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질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돌궐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조진을 토벌대장으로 임명했다. 당고종은 아무래도 조진 혼자서 가는 것이 미덥지 않아 안시성과 펴라성에서 자소와 싸워본 경험이있는 설인귀를 부장으로 딸려 보냈다. 조진은 일찍이 백제에서 귀화한 흑치상지와 함께 공중에 나는 새도 넘나들지 못한다는 서장(티베트)을 정벌해 특히 산악전에 능숙한 장수로 이름이 나 있었다. 또 무예 못지 않게 지략도 특출해 당고종이 총애하는 장수 중의 하나였다. 그래도 조심스러운 당고종은 출정하는 조진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첫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멀리 쫓지 말고, 이기더라도 자소를 더 더 멀리 쫓아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오시오." 당고종은 혹시나 조진이 자소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길도 없는 밀림 속에서 전멸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조진이 3만 대병을 이끌고 산남으로 출병한 지 한 달여 만에 익주를 지나자 말로만 듣던 아열대성 밀림이 앞길을 막았다. 온갖 나무와 덩굴들로 빽빽이 들어찬 밀림을 보자 조진은 문득 떠오르는 고사가 있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천하 제일의 전략가라고 불리우는 촉나라 제갈공명이 남만 깊숙이 쳐들어가 남만왕 맹획을 칠종칠금(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놓아줌)할 때 맹획의 수천 군사를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계속 속으로 유인하여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옳거니! 숲이 우거진 곳에서는 역시 화공뿐이다." 결심이 선 조진은 공격의 목표를 제2대 마을로 정했다. 첫번째 마을을 들이치면 나머지 두 개 마을이 힘을 모아 대항해 올 것이고, 깊숙이 들어가서 맨 마지막의 제3대 마을을 치면, 앞의 두 마을의 역습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간에 있는 제2대 마을을 공격하여 허리를 두 동강내 버리는 것이 자소의 고구려군을 단번에 박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진 역시 당대에 드물게 보는 지략이 있는 장수였다. 그러나 정쟁은 종종 운에 따라서도 승패가 뒤바뀌는 법이다. 당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던 고구려군은 차츰 시간이 흐르자 방비가 소홀해졌고, 당군의 조진 또한 그날이 우연찮게도 설날이어서 자소가 제2대 마을에 와 있는지 사전에 알 리가 없었다. 제2대 마을 공격에 실패하고, 하룻밤을 새운 당군은 이젠 오도가도 못 하는 어정쩡한 처지가 되었다. 날이 뿌옇게 밝은 다음에야 조진은 자소에게 속은 것을 깨달았다. 북쪽 산등성이에서 피리를 불었던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조진은 땅을 치며 분해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다니..." 자소는 그날 밤 괴이쩍은 피리소를 듣는 순간 당군의 허허실실 전법을 간파했다. 그래서 일부러 당군의 피리 부는 방향으로 마을 사람들을 빠져 나가게 한 것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군사들을 시켜 당군이 피리를 불던 바로 그 산봉우리에다 불을 피워 놓고 흥겹게 놀라 함으로써 조진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제3대 마을까지 무사히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자소는 2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3대 마을로 향하면서 사람을 따로 1대 마을로 보내 당군의 공격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자모가 직접 정병 700여 명을 인솔해 3대 마을에서 야습에 실패한 당군이 싸움다운 싸움 한번 시도해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자소는 3대 마을에 도착하는 즉시 마을 사람들을 정글 깊숙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2대와 3대 마을의 1500명 남짓한 병사들을 3대 마을 부서쪽 깊숙한 계곡 양쪽 산중턱에 매복시키고 따로 50여 명을 추려 산꼭대기에다 배치시켰다. 아울러 따로 추린 50여 명의 병사들에게는 당군의 눈에 쉽게 뛸 수 있도록 움직이라는 명령도 내렸다. 즉 산꼭대기에서 움직이는 고구려 병사들을 보고 당군이 골짜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 오면 양쪽 산허리에 매복시킨 병사들이 일시에 불을 지르고 달려들어 당군을 전멸시킨다는 계략이었다. 한편, 그날 아침 조진도 궁리를 짜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3대 마을로 더 깊숙이 쳐들어가서 고구려 포로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조진의 작전 계획을 들은 설인귀는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조 장ㅇ군, 첩첩 정글 속에 있는 3대 마을을 공격하는 것은 자칫 우리군이 전멸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차라리 제일 바깥쪽에 있는 1대 마을이나 소탕하고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조진은 설인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 잔당들을 궤멸시킬 수가 없지 않소." "기습 공격에서 실패했으니 이곳 지리에 익숙한 고구려 군사들을 전멸시킨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오." "아니오. 우리가 만약 3대 마을만 박살낼 수 있다면 중간에 낀 1대 마을은 퇴로가 차단되어 우리에게 항복하는 길밖엔 없소." 조진은 산세가 험한 서장을 정벌했던 경험이 있는 터라 이번 일도 그리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전쟁터를 누비다시피한데다 더욱이나 자소를 잘 알고 있는 설인귀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무리해서 마지막 3대 마을까지 쳐들어가서 싸운다고 해도 큰 이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1대 마을에서 협공을 해오면 꼼짝없이 사지에 갇힌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가서 후회를 해도..." 설인귀가 끈질기게 고집을 부리자 조진은 그만 발끈했다. "설 장군은 고구려전까지 치른 사람이 어찌 그리도 겁이 많소? 기둥뿌리를 뽑지 않고 어떻게 집을 무너뜨릴 수가 있단 말이오?" 설인귀도 무장인지라 조진의 모욕적인 언사에 귀밑이 후끈 달았지만 꾹 눌러 참고 좋은 말로 다시 한 번 타일렀다. "천자께서도 우리가 너무 과욕을 부린 나머지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 미리 당부가 계셨는데..." "설 장군, 너무 걱정마시오. 고구려 포로들이야 기껏 2천 명. 우리는 그 열 다섯 배가 되는 3만 명이오. 어떤 경우든지 우린 그들을 수적으로 깔아뭉갤 수 있소." "그래도 상대는 자소요." 조진은 순간 자기가 비하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어허! 설 장군은 그간 자소에게 당하기만 하여 미리서 겁이 난 모양인데, 이번 기회에 당나라에도 이 조진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겠소." 그리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워 피곤한 병사들을 재촉해 마지막 3대 마을로 향했다. 정글 속에 새길을 내면서 나가는 행군이라 병사들은 극도로 지쳐서 자연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조진은 서장과 싸울 때 천산남로를 넘던 기백만은 살아 있어 병사들을 강압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행군에 행군을 거듭하여 마지막 3대 마을에 다다른 조진은 무엇을 보았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허 허! 유치하군 유치해." "무엇이 말입니까?" "저것 좀 보시오. 이젠 자소도 천명이 다 됐소." "? ? " 영문을 몰라서 조진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설인귀에게 조진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자소의 전술이 빤하지 않소? 우리가 저 산꼭대기에 있는 자기네들 군사를 공격하려고 급히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 산허리에 매복시켜 놓은 복병으로 우리를 단번에 덮치려는 전술이오." 조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맞은편 산봉우리에 살기가 돌면서 사람들이 숨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자소도 이곳지리를 잘 모르는 조진을 한 수 아래로 보고 당군을 단번에 무찌를 셈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조진은 자소의 전략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고구려군의 주력은 저 양편 산허리에?" "그렇소. 저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고구려 군사들은 우리를 골짜기로 유인하려는 낚시밥이오." "과연, 조 장군의 지략은 범상치 않습니다." 설인귀도 그만 조진의 예리한 판단력에 감탄했다. "오늘은 천하의 자소를 냉큼 생포해서 장안으로 끌고 갈 테니 설 장군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구려." 말을 마친 조진은 급히 작전 계획을 짰다. 당군은 4대로 나누어 1대가 북과 징을 요란하게 울리며 골짜기 입구에서 싸우는 척하는 동안 나머지 3대는 멀리 우회하여 고구려군을 완전히 포위해서 일격에 들이치면 고구려군은 역으로 당군이 들어오기를 바랐던 골짜기 아래로 밀려내려갈 수밖에 엇다. 이때 당군이 골짜기에 불을 지르면 고구려군은 단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하고 모두 타 죽는다는 무서운 전략이었다. 작전대로 당군의 1대는 골짜기 입구에 들어와 진격하는 척하며 어물거렸다. 그때 자소도 밀림 속에 몸을 감추고 당군의 선봉대가 골짜기 입구로 접근하는 것을 숨죽여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 가므님, 오늘에야 우리 고구려 백성들의 철천지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자소는 시시각각 긴장한 가운데서도 다음 순간 벌어질 대살육전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그런데 웬일일까, 골짜기 입구에 다다른 당군은 산꼭대기에서 오르락거리는 눈앞의 고구려군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어물거리고만 있지 않은가. 금방 돌격이라도 할 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도 정작 계곡 안쪽으로 쳐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자소의 마음속에 더럭 의심이 났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군에게 역포위를 당하고 있는 중이라면?" 자소는 자신의 커다란 실수를 깨닫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러나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장수 된 자는 빠른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장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다가는 군사가 전멸하기 십상이다. 자소는 급히 부장 명림수기가 불렀다. "우선 50을 인솔하고 각각 흩어져서 정글을 빠져 나가라." "예." "용케 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가면 배후에서 불을 질러라. 그리고 계속 소리를 질러 대라." "예, 알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전멸당하면 너희들은 당군보다 한발 앞서 3대 마을로 가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도망가 목숨을 보전해 훗날을 기약한다." 자소는 머뭇거리는 명림수기의 등을 떠밀어 급히 떠나 보냈다. 그리고 나서도 자소는 촌각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계곡 바깥쪽 산비탈에 불을 질러라." 병사들이 계곡 바깥쪽을 향해 급히 불을 놓고 있는 동안 자소는 눈을 감았다.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가 당군을 얕잡아본 것이 이런 실수를 가져왔구나.' 어느덧 계곡 바깥쪽 이곳 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당군도 계곡 전체를 포위하고 불을 지르라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고구려 결사대 50명은 민첩하게 당군의 포위병 사이를 빠져나간 후였다. 한편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진과 설인귀는 계곡 바깥쪽 비탈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연기와 불꽃을 보았다. "엇! 이상하다. 어인 불꽃이냐?" 조진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연기와 불길이 솟자 순간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포위하고 있는 자기편에서 서둘러 지른 불길로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포성을 울려라." 조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포성 소리가 연이어 지축을 흔들었다. 쿵! 쿵! 포성소리를 들으며 조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젠 자소도 끝장이다. 곧 불길을 피해 계곡 아래로 쫓겨 내려 오겠지...' 자소의 고구려군이 계곡 안으로 내려오기만 하면 입구에다 불을 놓아 고구려군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태워 죽이리라 독하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설인귀가 급히 조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조 장군! 불이, 불이..." "불이 어떻다는 거요?" "불이 계곡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타내려 가고 있습니다." "계곡 밖으로? 설마 그럴 리가..." 설인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조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저런 일이..." 그사이에도 불길은 정글의 생나무를 태우면서 산등성이에서 계곡 바깥쪽의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이젠 조진이 설인귀를 향해 부르짖었다. 그때 조진은 또 포위하고 있는 당군의 뒤쪽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명림수가의 결사대 50명이 당군 뒤로 돌아가서 지른 불이었다. 어느덧 당군은 불길 사이에 오도가도 못하고 끼어 버렸다. "아뿔싸! 여우 같은 자소놈에게 또 속았구나." "뭐라고요?" "우리 당군이 자소놈에게 역포위를 당했소." 그러나 조진의 명령도 신속했다. "설 장군, 어서 우측에 있는 우리 군사들을 구하시오. 나는 좌측으로 돌아가서 구해내야겠소." 골짜기 바깥쪽에다 불을 질러 마치 배화진을 친 것처럼 도망갈 수 있는 바늘 구멍 만한 틈새마저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던 자소는 계곡 입구를 막고 있던 조진과 설인귀가 군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보자 급히 전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순간뿐이다. 전원 계곡 입구를 향해 돌격!" 계곡 양편 비탈에 숨어 있던 고구려군 천여 명은 일시에 산을 내려가 계곡 입구 쪽으로 치달렸다. 조진과 설인귀의 주력 부대가 이미 빠져 나간 계곡 입구에는 당군의 잔여 부대가 남아 있었으나 노도같이 달려드는 고구려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군은 이들 당군의 잔여 부대를 단숨에 짓밟고 계곡 밖으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탈출 순간이었다. 조진은 좌측 산모퉁이를 막 돌아서는 순간 계곡 입구를 빠져 나와 북쪽으로 도망치는 한떼의 고구려 병사들을 보았다. "아차! 내가 또 속았구나. 독 안에 든 쥐새끼를 그냥 놓치다니..." 조진은 땅을 치며 분해했다. 조진은 급히 병사들을 되돌려 고구려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정글 생활에 익숙해진 고구려군을 뒤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소의 고구려군은 당군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데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리며 한떼의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자소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 아! 이것이 정녕 마지막인가.' 그때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자소 장군님, 웬일이십니까?" 제1대 마을의 자모였다. 2대 마을에서 보낸 연락을 받고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는 길이었다. 오다가 보니 밀림 속이 온통 불바다여서 혹시나 고구려군에게 불상사라도 생겼나해서 이곳까지 급히 달려왔다고 했다. 또 오는 길에 숲속에 교묘히 은폐해 놓은 당군의 군량과 경비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살랐다고 했다. "자모, 급히 분산해라. 그리고 주위의 산봉우리마다 올라가서 불을 놓아라. 혹시 당군이 공격해 오거든 맞싸우지 말고 모두 도망쳐라. 마지막으로 북쪽 산봉우리에 집결해서 당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그럼 자소 장군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3대 마을로 통하는 남쪽 계곡으로 간다." 그때 당군의 추격대가 가까이 접근했는지 정글 속의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 왔다. 자소와 자모는 각기 흩어져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제 갈길로 떠나갔다. 자소는 남쪽 계곡으로 들어서자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덫을 놓아라. 그리고 함정을 파라. 많을 수록 좋다." 한편 조진과 설인귀는 정글 속에서 더 이상 추격전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 밤은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아침 출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밥을 짓기 위해 군량을 가지러 갔던 병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돌아왔다. "크, 큰일났습니다. 군량 전부가 불타 버렸습니다." "뭐? 군량이 모두 불타 버렸다구!" 조진은 눈앞이 캄캄해 왔다. '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조진은 비로소 자소를 깔보고 대군을 몰아 정글 깊숙히 들어 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조진 장군,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조진이 허둥대는 꼴을 보고 설인귀가 옆에서 간했다. "어떻게 돌아간단 말이오? 무주까지 가는 데만도 족히 열흘은 걸리는데, 식량도 없이..." "..." 설인귀로서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조진은 설인귀의 말은 듣지 않은 것이 뼈아프게 후회스러웠지만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둠이 내리자 멀리 바라다보이는 주위의 산봉우리가 벌겋게 타올랐다. 당군들은 배고픔도 잊고 엄습하는 공포에 덜덜 떨며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조진은 결심이 섰는지 부장들을 불러모아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남쪽에 있는 3대 마을로 쳐들어간다." "옛?" "그곳에는 배불리 먹을 식량이 있을 것이다." "조진 장군!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설혹 군사들의 반을 잃는다 해도 지금에 와서는 그 길밖에는 없습니다." 설인귀가 옆에서 계속 말렸지만 조진은 그날따라 이상하리만큼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냥 도랑가자니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자신의 신세가 어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옛말에 궁즉통이라고 했다. 궁할 수록 오히려 역으로 나가 자소의 예상을 뒤엎고 전세를 만회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자소는 벌써 우리를 꿰뚫어보고 남쪽 계곡에다 우리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다 해놓았을 것이오." "설 장군은 아직도 자소라면 벌벌 떠는데 여기는 고구려가 아니오. 내 잠시 불운하여 다 잡은 자소를 놓쳤지만 이번엔 틀림없이 자소를 잡아죽일 테니 두고 보시오." 조진은 설인귀 앞에서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그도 울창한 정글 속에서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조진은 가까이에 있는 3대 마을만 점령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군사들을 꼬드려 3만이라는 대군을 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당군이 남쪽 협곡에 이르렀을 때, 앞서 가던 병사 수 십명이 고구려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바람에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갑자기 정글 속은 공포로 변했지만 행군은 계속되었다. 먹을 것을 모두 잃어버린 당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가까이에 있다는 3대 마을을 덮치는 길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숲이 점점 깊어지는데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군 수십 명이 앞을 가로 막았다. 조진은 칼을 빼들고 몸소 앞으로 나갔다. "요 쥐새끼 같은 포로놈들이..." 조진과 앞장서 가던 당군이 일시에 달려들자 고구려 병사들은 싸우는 체하다가 요리조리 피래 도망쳤다. 그런데 기를 쓰고 쫓아가던 조진은 문득 땅이 꺼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극심한 통증이 왔고 동시에 주위가 캄캄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아픔도 끝났다.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함정이었고 함정 속에 박아 놓은 죽창이 조진과 대여섯 명의 당군의 몸통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당의 천하명장 조진의 일생도 오지에서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설인귀는 죽창에 꿰뚫려 계속 시뻘건 피를 토해 내고 있는 조진의 시신을 겨우 건져낸 다음 급히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바로 그때 숲속에 북소리가 빠르게 퍼졌다. 둥 둥 둥 ... 북소리와 동시에 계곡 입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뒤이어 동, 서, 남, 북 사방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불길은 삽시간에 무서운 기세로 당군을 에워쌌다. 전날 조진이 계곡 속에 갇혀 있던 자소의 고구려군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바로 그 화공 전법이 바로 그 다음날 자소에 의해 당군을 똑같은 처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불길 속에 갇힌 당군은 그대로 타죽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살이 타는 노린내가 온 숲 속을 진동했다. 불 속에 갇힌 3만 명의 당군은 한데 몰려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는 송충이처럼 땅에 떨어졌다. 그때 열대여섯 명의 당군이 어떻게 불길 속을 빠져 나왔는지 북쪽을 향해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만 살아온 설인귀의 모습도 보였다. "제가 쫓아가서 저놈들을 냉큼 생포해 오겠습니다." 자소 곁에 있던 명림수기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자소는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놔두어라." 간신히 불길을 빠져 나온 설인귀 등 열대여섯 명의 당군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으며 북쪽 산자락을 기어오를 즈음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이 쥐새끼 같은 되놈들! 어디로 도망가느냐?" 삽시간에 고구려 병사들이 설인귀 일당을 둘러쌌다. 자소의 명령을 받은 자모 부대가 미리 북쪽 산봉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으로 도망쳐 오는 당병들이 산비탈에 닿을 무렵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해 버린 것이다. 설인귀 등이 결박을 당한 채 자소 앞으로 끌려온 것은 싸움의 뒷수습이 대강 끝난 뒤였다. 자소와 설인귀는 저 안시성 전투로부터 펴라성 수성전에 이르도록 평생을 맞서 왔던 호적수. 자소는 펴라성 전범재판 때 처형장으로 끌려갈 처지에 놓인 자신을 설인귀가 변호해 주던 옛일을 잊지 않았다. "설 공, 오랜만에 만나는구려." "오랜만이오." 설인귀도 무장인지라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무슨 인연이 기구해서 이렇게 악연으로 만난단 말이오?" 자소의 나이 이미 오십이 가까운 터라 그의 말에는 세상을 초월한 허허로움이 엿보였다. "..." 설인귀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설 공, 이제 어찌하려오?" 설인귀는 기제사 얼굴을 들어 자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생사를 초월한 평안함이 느껴졌다. "한낱 패군지장일 뿐, 어서 죽여주시오. 그것만이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나는 일찍이 창검을 들고 맞 싸울 때는 생사를 결판냈지만 붙들려와 저항할 수도 없는 포로를 학대하거나 죽인 일이 없소." "..." "어서 가시오. 설 공이나 나나 다같이 늙어 가는 몸, 다시는 이런 기구한 인연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날 자소는 설인귀를 놓아주었다. 설인귀 하나 죽인다고 해서 이미 망해 버린 조국 고구려가 되살아 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를 놓아주는 것이 그간 당군에게 받은 학대에 대한 후련한 복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군 3만 명을 전멸시킨 자소의 고구려군은 3대 마을에서 회의를 열었다. "앞으로 머지않아 당군의 대부대가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오. 그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다시 이곳을 떠나야겠소." 자소의 침통한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당의 대군이 밀어닥치기 전에 더 서쪽으로 깊숙이 이동해 가자는 것이었다. 당나라는 3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몰살한 데 충격을 받고 다음엔 엄청난 규모의 토벌군을 파견할 것이 분명했다. 당군과 대접전을 치른 지 보름쯤 지나 고구려 유민들은 가재 도구를 챙겨서 서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니나다를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조진의 부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은 당나라 조정에서는 10만 명의 군사를 풀어 자소의 고구려군을 추겨했지만 끝내 종적을 찾을 수 없어서 되돌아갔다. 자소의 고구려 유민들은 6년씩이나 정들었던 정착지를 버리고 서남쪽으로 이동해 갔다. 그간 어린애를 많이 낳아 인구가 2만여 명으로 제법 불어났지만 대부분이 아직 일곱 살도 안 된 어린이들이어서 행군 속도가 여간 더딘 것이 아니었다. 유민들은 태초이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밀림 속을 계속해서 내려갔다. 이렇듯 행군이 여러 날 지속되자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한 걸음 떼어놓기도 힘들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먼길을 가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당군의 추격권에서 벗어나 살아 남는데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강을 찾으려는데 있었다. 이미 중원 대륙을 관통해서는 고구려 땅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니까... 이제는 바다를 이용해서 조국 고구려로 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군이 두 달이 넘을 즈음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자소의 몸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자소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지만 걷는 것도 힘에 겨워하고 하루하루 몰라보게 야위어갔다. 또 밤에는 열이 올라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고구려 포로들은 강제로 권하다시피 해서 자소를 교대로 등에 업고 가다가 나중에는 들것에 누이고 들고 갔다. 그러나 자소의 병세는 조금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밤인가 자소는 고열에 시달려 헛소리를 했다. "나싸, 초혜. 미안하오. 나 이제 곧 그대들 곁으로 가겠소." 남편 자소와 두 딸 나선, 나라가 펴라성에서 끌려간 지 꼭 석 달째 되던 날, 그 동안 곡기를 끊고 지내온 자소의 두 아내 나싸와 초혜는 마침내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자소는 고열로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동안에 아내들을 만난 것일까.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막내딸 나라가 자소의 몸을 흔들며 안타까워했다. 아침이 되자 자소는 열도 좀 내리고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자소의 눈빛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움푹 들어간 눈은 생기를 잃고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자모, 명림수기, 을지사영, 여을수 등의 지도자들은 자소의 곁에 꼭 붙어서서 행군을 계속했다. 이들도 자소의 병세로 보아 그의 명이 오래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급기야 자소는심한 혼수상태에 빠져 헛소리를 해댔다. 응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아무도 알수 없었지만 자소는 실제로 안개같이 뿌옇게 흐린 의식 속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므여!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자소의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대답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무도 모른다.' "그럼, 내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영원을 향해 가고 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래, 바람이 불고 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 바람이 그 곁을 지나가고 있구나.' "왜 하늘은 언제나 저렇게 푸릅니까?" '하지만 그 위로 네가 볼 수 없는 세월이 흘러간다.' 갑자기 두 줄기의 눈물이 자소의 수척한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어 자소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므님! 가므님! 제발 시간을 멈추게 하여 주십시오." '...' 대답 대신 자소의 귀에 들려 오는 것은 밀림 속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그사이에도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두 달하고도 스무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어쩐 일인지 자소의 병세가 다소 호전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소의 눈에는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생기가 감돌았다. 자소는 손을 들어 자모 등 지도자들을 가까이 오게 했다. "내가 먼저 고향으로 돌아간다." 자소의 말을 들은 지도자들은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자소 장군님!" "산꼭대기에 솟대를 세우고 가므님을 떠받들고 살아라. 그래야만이 언제까지나 고구려 사람으로 살아 남는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때가 되거든, 때가 되거든..." 처음에는 또렷하던 자소의 목소리가 자꾸만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도 다시금 퍼뜩 정신이 되돌아오면 제법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다로 가거라. 우리 조상들이 남쪽에서 건너왔던 ... 그 뱃길을 찾아보아라." 모두들 숨소리 하나 없이 손에 땀을 쥐며 듣고 있었다. "자모를... 자모를... " 자소의 목소리는 이내 가래 끓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때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 왔다. "강이 보인다.!" 선발대로 나가 있던 사람들이 드디어 강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오면서 외쳐 대는 소리였다. 문득 자소의 입가에 엷은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실낱같은 의식 속에서도 자소는 강이 보인다고 외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자소는 감았던 두 눈을 갑자기 부릅뜨더니 이내 그렇게 굳어졌다. 자소의 나이 50세였다. 곁에 있던 자모가 손을 들어 자소의 부릅뜬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자소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 포로들은 오래오래 참아 왔던 설움이 일시에 복받쳐 올랐다. 모두 목을 놓아 통곡했다.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혔던 한이 봇물 터지듯 솟구쳐 나왔다. 자모의 마음속도 텅 빈 것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자소를 잃은 좌절감이 뼈를 저미는 듯했다. '자소 장군님, 고구려의 한을 저희들이 기필코 갚고야 말겠습니다.' 자모는 다짐하듯 읊조렸지만 죽은 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자모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자소의 시신을 강 언덕에 묻고는 고구려 포로들을 이끌고 강으로 내려갔다. 강 폭은 상당히 넓었다. 그러나 예전에 고구려에서 보던 강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물이 유리처럼 맑아, 강바닥에 깔려 있는 자갈 사이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까지 다 보이는 그런 강이 아니었다. 강폭을 가득 메우며 흘러내리는 것은 흙탕물이었다. 고구려 포로들은 그때 중국 남부를 흐르는 주강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자모는 뗏목을 만들어 백성들을 건너게 했다. 강을 찾아낸 이상 더 남쪽을 향해 행군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자소의 유언대로 다시 백성들을 3대로 나누어 강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다 마을을 이루어 정착시켰다. 다시 집을 짓고 산골짜기에다 논과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는 등 새롭게 삶의 터전을 꾸리는 데 꼬박 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사이 생활도 넉넉해지고 모두들 안정을 되찾자 자모는 자소가 유언했던 그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 당군을 몰아내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길은 막연했다. 그즈음 고구려 땅 영주에서는 펴라성이 함락되기 직전 압록현으로 도망쳤던 대중상이 무리를 모아 당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땅에서 만 리나 떨어진 주강 남쪽의 무인지경속에 고립되어 있는 고구려 포로들은 고구려가 망한 후 30년이 지나도록 대조영이 드디어 펴라성 이북의 고구려 국토를 완전히 회복하고 건국의 기초를 닦고 있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다. 부활의 대화 자소에 이어 고구려 유민들의 지도자가 된 자모는 세 부락의 지도자 회의를 열고 그들의 오랜 숙원인 고구려 회복 문제를 의논했다. "역시 자소 장군의 유지를 따라야 합니다." "강을 따라 내려갑시다. 바다로 나갑시다." 명림수기와 여을수가 의견을 내놓았다. 결국 우선 인원을 차출해서 강을 내려가 바다를 찾아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통나무를 엮어 튼튼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식량을 싣고 강을 따라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면 곧바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며칠 후 세 부락에서 뽑은 100여 명이 뗏목 10개에 나누어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졌다. 8일째 되던 날 새벽이었다. 강 폭으로 보아 거진 바다에 가까워졌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해가 떠로르면서 강 위에 깔려 있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갑자기 눈앞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당군이다." 자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수심이 깊은데다 물살이 세어 뗏목을 금방 멈출 수가 없었다. 뗏목은 거센 물살을 따라서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이르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당군이 아니었다. 당나라 사람들은 노리끼리한 살빛에 키가 작고, 얼굴은 넙적하며 코는 납작하니 펑퍼짐했다. 그런데 이들은 살빛이 희고, 키가 크며, 콧날도 오뚝해서 오히려 고구려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들도 뜻밖에 강을 타고 내려온 한 떼의 사람들을 보자 무척 놀란 모영이었다. 그들은 불안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너흐래 아쑤라(너희는 누구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이 하는 말은 고구려 말과 비슷했다. 자모는 그들이 묻는 말을 대충 짐작하고는 대답을 했다. "나흐래 고구려 치요(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의 표정이 금세 밝아 왔다. 그들도 자모가 하는 고구려 말의 뜻을 대충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고구려 치라?" "예, 예." 서로 얼마쯤 말이 통하자 경계심을 풀고 금방 친숙해졌다. 강하구에서 뜻밖에 만난 사람들은 아요디야국(인도 대륙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요디야?" "아 예, 아요디야(아유타야)에 라웨요(아요디야에서 왔어요)." 자모의 머리 속에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고구려의 먼 선조들이 아유타야국을 거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 남쪽 해변가에서 살고 있던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후도 그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대들은 혹 고구려나 백제, 가야라는 나라를 아시오?" "알고말고요. 그 사람들은 아요디야보다 더 서쪽에서 이동해 와서 아요디야국 근처에서 한동안 살다가 해 뜨는 곳을 찾아 다시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떠나간 사람들이라고 들었소." '아! 그렇다면...' 막연하기만 했던 앞날에 갑자기 기적 같은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자모는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고구려로 가는 바닷길을 아시오?" "가본 일은 없소. 하지만 여기서 배를 타고 북쪽으로 석 달을 가면 백제국이 나오고 또 거기서 서쪽 해안선을 따라 보름을 더 가면 고구려국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석 달을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같다..." 고구려 사람들은 원래 대륙으로만 힘을 뻗어 나간 터여서 바다에 대해서는 어두웠다. 자모는 다시금 암담해졌다.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모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북극성을 마주보며 북쪽으로만 가시오. 여름철에는 바닷물이 북쪽으로만 흘러 고구려까지 가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소." 자모 일행은 강 하구에 매어 놓은 아요디야 사람들의 배도 구경했다. 인근 나라로 돌아다니며 무역을 한다는 황포 돛배는 한척에 50명 가량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모 일행은 그 아요디야 사람들의 마을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고구려가 망한 것과 그 때문에 겪었던 온갖 수난을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도 자모 일행의 딱한 사정을 듣고나더니 흔쾌히 도와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자모 등은 그들에게서 배 만드는 기술자와 쇠붙이 연장들을 빌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자모는 밀림 속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베어다 5년을 강물 속에 담가둔 후 말리고 또 증기로 쪘다. 나무가 마르고 쪄져서 바닷물 속에서 줄어들거나 썩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배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밤낮없이 동원되었다. 황포 돛배 200척을 만드는 큰 역사였다. 배가 이 정도는 있어야만이 1만 명의 군사들을 싣고 고구려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배는 강가에서 만들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뚝딱거리며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200척의 배를 만드는 데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그사이 자모, 명림수기, 여을수 등 고구려 포로 1세들도 어느덧 마흔을 넘기고 조무래기 아이들도 당당한 청년들고 성장했다. 고구려 청년들은 매일같이 배 만드는 일과 고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고구려 백성들이 중국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온 후 꼭 30년째 되던 어느해 봄날,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큰 잔치가 벌어졌다. 온 마을이 아침부터 떡을 하고, 술을 빚고, 물소를 잡는 등 떠들썩했다. 바로 그날이 고구려를 회복하기 위한 군사가 출정하는 날이었다. 자모는 그날 새벽 몸을 정결하게 하고 마을의 지도자들과 소도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했다. 우리 민족을 태어나게 하시고 지켜 주신 가므님! 오늘은 당나라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출정하는 날입니다. 당나라의 말발굽에 짓눌려 있는 우리의 강토를, 그들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겨례를 구하게 해주십시오. 다시 우리의 땅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게 해주십시오. 가므에게 고하고 난 다음, 지도자들은 자소의 무덤을 찾아가 다시 출정을 고했다. 이어서 병사들이 모두 집결해 있는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 출정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자모의 곁으로 이미 중년이 된 한 여인이 다가왔다. "여보,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내 나라였다. 자모는 나라의 손을 꼬옥 쥐었다. "기필코 나라를 구하겠소. 그런 다음 이곳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데리러 오겠소. 그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시오." "당신을 언제까지 기다리고 말고요. 그러나 제 마음은 당신을 따라갑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출정하는 자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고구려 광복군 조직은 총대장에 자모, 부장에 명림수기, 을지사영, 여을수 그리고 그 밑에 아장, 조장 등의 정연한 편제로 짜여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자모의 외아들 자철도 조장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자모는 나라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고 있었다. 딸 나데도 벌써 열 여섯 살이 되어 처녀티가 완연했다. 어머니 나라를 닮아 흰 얼굴이 갸름하고 검은 눈썹 아래 두 눈이 별빛처럼 맑아 마을 총각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거기다가 남다르게 영특해서 자모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 나라를 도와 부족들을 잘 돌볼 것이었다. 나데에게는 이미 아소미네라는 든든한 짝이 있어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했다. 산남으로 끌려온 초기에 모진 고생을 함께 했던 아소수찬의 외아들로 고아가 되어 마을 사람들 손에 자라다시피한 것을 자모가 데려다 수양아들처럼 기른 젊은이였다. 그날 아침 출정식을 마친 고구려 광복군들은 미시에 모두 승선을 했다. 이윽고 청, 홍, 황색의 깃발들을 나부끼며 자모의 대장배를 선두로 미끄러지듯 강을 타고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강가로 나와 자모의 선단이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자모의 광복군은 마을을 떠난 지 8일 만에 강 하구의 아요디야 사람들 마을에 도착해 그날 밤을 그곳에서 묵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200척의 선단은 드디어 닻을 올리고 고구려를 향해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더 없이 푸르고 잔잔했다. 해류가 북쪽으로 흐르고 거기다가 황포 돛이 찢어지도록 동남풍을 받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자, 육지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대신 눈앞에는 수평선만이 보였다. 배 위에 있는 병사들의 마음도 한껏 부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했던 꿈인가, 드디어 우리는 조국 고구려를 되찾기 위해 간다.' 그런 자모의 마음을 아는 듯 매일같이 하늘은 푸르렀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매기 떼들이 수면 위로 미끄러지듯 곤두박질을 치다가는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황포돛 위에 앉아 푸드득 날개짓을 해대곤 했다. 석자 내지 여섯자 크기의 파도가 계속 뱃전을 두들기고 그럴 때마다 배가 앞뒤로 혹은 좌우로 마구 흔들렸지만 큰 바다에서 그만한 파도는 으레 있는 것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은 처음 얼마 동안은 뱃멀미로 몹시 고생을 했지만 한 열흘쯤 지나니까 익숙해져 견딜만 했다. 자모의 고구려 광복군은 벌써 보름째 순조롭게 향해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물결이 잔잔해졌다. 일렁이던 파도가 슬며시 자지러들면서 수면이 고여 있는 호수처럼 잔잔해 졌다. 배가 조금도 흔들이지 않으면서 미끄러지듯 바다 위를 가자 병사들은 흐뭇한 얼굴로 한 마디씩 지껄여 댔다. "바다도 조국을 구하러 가는 우리를 돕는구나." "모두 다 가므님의 보살핌이야." "이젠 되놈들도 끝장이다." 그런데 넓은 평원을 주름잡으며 말을 달리던 자모 등의 1세대들과 밀림 속에서만 자란 2세대의 젊은 병사들은 바다에 대해서는 깜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한낮이 기울 즈음 갑판 위에 있던 병사 하나가 황급히 뛰어들었다. "자모 대장님, 앞에 뭔가 보입니다." "그게 뭐란 말이냐?" 자모는 병사 뒤를 따라 갑판 위로 올라가서 그가 가리키는 남쪽 하늘 끝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곳에 콩알만한 검은 점이 보였다. 자모는 조그만 섬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 후 한식경이 지나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차츰 높게 일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미풍이 슬슬 불어오기 시작했다. 자모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갑판 위로 다시 올라가 보았다. 그때는 벌써 온 바다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파도가 흰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뱃전을 때렸다. 더욱 괴이쩍은 것은 남쪽 바다 수평선 끝에 떠 잇던 조그만 콩알 크기의 검은 점이 어느새 손바닥만큼 커져서 그들 가까이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제서야 자모도 문득 불안을 느끼고 뒤를 따르는 배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밧줄로 배들을 서로 묶어라. 그리고 키를 육지 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이미 대는 늦었다. 그로부터 한식경 후, 맑던 하늘에 온통 먹구름장이 뒤덮이고 강풍이 쇳소리를 내며 사납게 불어 왔다. 그 사이로 폭우가 장대처럼 쏟아졌다. 해마다 늦 봄으면 남지나해에서 발생하는 태풍이었다. 그들은 불운하게도 태풍 속에 들어 있었다. 바다는 밑바닥에서 갑자기 불끈 솟아올라 배들을 위로 떠밀어 올렸다가는 다시 깊은 물밑으로 처박았다. 그때마다 고구려 병사들은 악!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날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서 돛을 내려라!" 자모의 다급한 외침을 어둠이 금방 삼켜 버렸다. 배들끼리 연결했던 동아줄이 우지끈 끊어지는 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연결이 끊긴 배들은 더 이상 성난 파도에 대항하지 못하고 뒤집힐 듯이 요동쳤다. 고구려 광복군은 순간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자모는 그만 갑판에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 "가므님! 가므님!" '...' "아아! 가므님. 어찌하여 저희들을 또 한번 버리십니까?" 자모는 한동안 통곡을 하다가 그만 기진해서 자리에 스러졌다. 그때 자모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루기 위해서다.' "뭐라구요?" '그것은, 그것은 이루기 위해서다.' "이루다니요? 저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 끝에 영겁의 어둠 속에서 또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누구나 다 이룰 수는 없다.' "그러면?" '너희들이 이룰 수 없다면 대신 다른 누가 이룰 것이다.' 자모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캄캄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저희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토록 무서운 시련을 주십니까?" '시련과 이루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못 이루는 자가 있기 때문에 또 이루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윽고 탈진해서 갑판에 널부러진 자모의 입에서 마지막 물음이 울먹이며 새어 나왔다. "그러면, 그러면 ... 저희들은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누구에게나 오직 영원한 편안함이 있을 것이다.' "아아! 가므님. 그래도..." 그때 배가 무섭게 요동쳤다. 그리고 갑판 위에서 중심를 잃고 이리저리 나뒹굴던 병사들은 문득 배가 높게 들어올려짐을 느꼈다. 배는 이내 한없이 깊은 곳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만주 벌판의 동북부에 자리한 중경현덕부(화룡)의 궁궐에서는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고구려가 망한지 곡 30년 만에(698) 펴라성 이북과 만주 벌판에서 당군과 신라군을 모조리 쫓아 버리고 고구려의 옛 강토와 백성을 되찾은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대진국(발해)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하는 취임식이었다. 대조영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당나라와 신라에 대항하여 복수할 것을 세 번 맹세했다. "원수를 갚자, 원수를 갚자, 고구려의 원수를 갚자." 이렇게 해서 20만 명의 고구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붙들려 간 옛 땅에는 다시 남에는 신라, 북에는 대진국으로 갈라진 남북조 시대의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멀고 먼 주강 남쪽까지 쫓겨간 고구려 백성들은 또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파편의 기억을 찾아서 하늘을 바라다보면, 햇살에 눈이 시리고 어느덧 파란 물감이 흰 무명배 위에 묻어 번질 것 같은 그런 티없이 맑은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매일 같이 자고 일어나서 바라다보는 주위의 풍광들은 도대체 바뀌는 것이 없었다. 울울창창한 아열대림이나 주간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야트막한 구릉들 하며, 주학산 허리를 따라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대나무집 마을들도 마치 태고적부터 거기에 있어온 것처럼 조는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도 흘러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었다. 바로 세월이었다. 두고 온 산하, 고구려에서라면 그들은 시간이 멈춰 있지 않고 회전목마처럼 반복해서 가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분명히 느끼면서 살수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고구려 땅의 척추뼈를 이루고 있는 장백산맥과 묘향산맥의 연봉들이 밤새 내린 첫눈을 하얗게 이고 겨울은 성큼 다가왔다. 곧이어 날씨가 살을 에는 듯이 추워지면서 눈보라가 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들, 산, 강 어디 할 것 없이 온 천지가 일시에 하얀 세상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우내 눈을 이고 있는 초가집 안에서 살면서도 봄, 가을 동안 땀흘려 거둬들인 곡식을 먹으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 동지 섣달이 되면 팥죽도 끓여 먹고, 도토리묵도 쑤어 먹었다. 질화롯가에 모여 앉아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드려주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소리에 기나긴 겨울밤이 깊어 가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이 장독대의 흰가루눈을 날리고, 밤새껏 아리수의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면 겨우내 쥐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는 도톰하게 부풀어 있고, 대지가 긴 밤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나는 숨결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해 봄이 시작되고 언 땅이 촉촉이 풀리면 사람들은 농사 채비를 서둘렀다. 골짜기마다 땅을 파고, 논을 갈고, 씨를 뿌렸다. 이윽고 파랗게 자란 보리밭 너머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면 날씨가 후끈 더워졌다. 연초록색의 들풀과 수목들이 짙은 녹청색으로 변하고, 해는 진종일 머리 위에서 뜨거운 햇살을 the아 냈다. 매미들은 느릅나무로 옮겨 다니며 진종일 성하의 찬가를 불렀다. 시냇가의 미루나무 위에서는 꾀꼬리가 화답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날마다 결실을 향해 여물어 가는 것이 있었다. 어느덧 결실의 무게를 감당 못한 벼 이삭들이 고개를 숙일 때쯤이면, 여름내 녹청색으로 싱그럽던 활엽수들이 그해의 마지막 향연을 위해 자신의 몸을 태우고, 이로 인해 산골짜기들은 빨갛고 노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소슬바람을 따라 나는 기러기 떼들을 보면서 또다시 계절이 바뀌는구나,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적어도 그들이 고구려에서 살 때는 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며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곳 남부 중국에서는 1년 내내 우기 아니면 건기뿐일까. 여섯 달 동안이나 줄창 쏟아지는 비가 잦아들면, 어느 날 문득 푸른 하늘이 보이고 마치 이것이 시작이나 되는 듯 다음 여섯 달 동안은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무더운 날씨만이 계속되었다. 정녕 이것이 세월이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어떻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자모.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회복하겠다고 배를 타고 떠난 자모. 그러나 이곳의 시간이 영원선상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한번 떠나간 자모 일행은 오래도록 뜬소문 하나 들려 오지 않고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속절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하루해가 서쪽산 능선에 한뼘 남짓 남이 있는 황혼 무렵이면, 주강 남쪽 언덕에 앉아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다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소복의 여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주강의 시퍼런 물결이 석양의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변하고, 이윽고 어둠에 싸여 잿빛으로 꿈틀댈 때까지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먼 곳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려 이제는 말끔히 지워져 버린 잔해들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느 날 문득 저 강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오는 한 떼의 형상들을 그녀의 망막 속에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밤이 늦었어요." "..."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 그러나 그 소복한 여인이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강물을 따라 멀리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뇌리 속에서는 그녀가 남부 중국의 주강까지 와버린 지나간 시간들을 몇 번씩이나 반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출생, 그리고 그녀가 철이 들고서부터 몇 해 만에 한번씩 변방에서 다니러 오는 아버지 자소, 그때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수척해졌고 그녀는 머리 속에서 그려 왔던 아버지의 모습을 밀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나라와 신라가 침략해 와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나라가 겨우 15살 되던 해였다. 복사꽃 아래에서 수를 놓다가 떨어지는 꽃잎에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던 그녀는 그녀 앞에 현실로 다가온 엄청난 충격을 운명처럼 참고 견뎌야만 했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있지 않아 큰오빠 자수가 욕이성에서 살수를 건너는 당군의 선발대와 접전을 하다가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죽었다. 다음은 펴라성 수성전에서 둘째 오빠 자영도 당군의 거점 마읍산으로 야습을 나갔다가 붙잡혀 다음날 아침 펴라성 성루에서 수성을 하고 있는 아버지 자소의 손에 열 아홉 살의 꽃다운 생명을 끊어야만 했다. 마침내 펴라성의 함락. 그리고 아버지 자소가 당군에게 꽁꽁 묶여 끌려가는 것도 보았고, 어느 날 밤 담을 넘어 온 당군에 의해 언니인 나영, 나선과 함께 거푸 윤간을 당하고는 까무라쳤던 쓰라린 기억, 다음날 아침 문설주에 목을 메어 자살한 큰 언니 나영의 늘어진 시신. 여기까지 떠올린 나라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몸서리쳐지는 듯 부르르 떨며 아픔을 한숨으로 토해 냈다. '아-.' 나데는 그런 어머니 곁에 우두커니 선 채 더 이상 채근하지 못했다. 지난 40년 동안 어머니 나라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질 무렵이 되면 이곳에 찾아오고, 회상의 반추가 끝나야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터였다. 그렇다. 지금에 와서 날짜를 분명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듬해 겨울, 눈이 내리는 날 나라는 언니 나선과 함께 수많은 고구려 포로들 틈바구니에 끼어 눈길을 걸어 북으로 끌려갔었다. 가도가도 지평선만이 보이는 요동벌에서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와 굶주림을 견디며 나라는 잡초와 같이 모질게 살아 남았다. 그녀는 고구려 국토의 마지막인 신성에서 둘째 언니 나선마저 전염병으로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드디어 중국 땅에 들어서 탁군을 거쳐 장안까지 가는 고구려 포로들의 죽음의 행진. 그 와중에서도 통제거의 물길을 따라가는 포로 수송선 위에서 자모와 혼인을 했다. 혼인이라야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절을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장안에서 양자강 남쪽으로 다시 끌려가는 고구려 포로들의 긴 여정, 나라는 양장강 남쪽에서 아버지 자소를 만났지만, 고구려 포로들을 토벌하러 온 당군과 또 한번의 혈전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일찍이 사람이 살아본 적이 없는 중국 남쪽의 무인 지대로의 계속된 도주. 도중에 나라에게 단 하나 남아 있던 혈육 아버지 자소마저 한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자소가 죽음으로써 나라의 가족은 오직 나라만 남고 모두 비명에 갔다.(나라는 그때까지 펴라성에 남아 있던 두 어머니 초혜와 나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라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제나 나라의 눈물과 한숨은 긴 회상이 이제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 후 배를 만들고 고구려 포로 2세들을 훈련시키기 12년, 드디어 남편 자모가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회복하겠다고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주강을 내려가고 난 후, 다시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나라를 비롯해서 남아 있던 고구려 포로 가족들은 길어야 2-3년 후면 떠나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나라는 매일같이 강가 언덕에 올라 자모 일행이 돌아오는 모습만을 그리며 40년을 보냈다. 검고 윤기 흐르던 나라의 머리에 어느덧 서리가 내렸고, 세월은 꽃처럼 아름답던 나라의 얼굴에서 하나 둘씩 주름살을 만들어 예전의 고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라는 자기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주간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망부석이라도 되려는 것인가. 나라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가벼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데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나라를 바라다보는 나데의 누누도 어느덧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가는 어머니였다. 더구나 요즈음 들어선 부쩍 초조해 하고, 무엇인가를 서두는 폼이 어머니가 옛날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는 나이 탓일까. 그날도 언덕에 올라 석상처럼 앉아 있던 나라의 간절한 눈빛은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라곤 티끌만한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밤길을 더듬어 마을로 향했다. 벌써 마을 이집 저집에서 켜놓은 코코넛 기름 등잔 불빛이 별빛처럼 어둠 속에서 깜박였다. 그사이 나데도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자모가 1만 명의 고구려 광복군을 이끌고 떠나갈 무렵 나데에게는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던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다. 아소미네라고 부르는 그 사내아이는 고구려 의사자 아소마연의 손자, 아소마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소마연의 가족이 당나라로 끌려오는 도중 두 내외와 큰 아들이 신성에서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고, 아소수찬이라는 둘째 아들만 겨우 살아 남아 목숨을 이어가며 장안까지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박복했던지 결혼을 한 후 얼마 안 되어 어린 외아들 아소미네를 남겨 두고 부부가 한해 걸러 죽어 버렸다. 어린 아소미네는 마을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영리하고 똑똑했다. 자소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고구려 유민들의 지도자가 된 나라의 남편 자모는 어린 아소미네를 끔찍이 귀여워했다. 때가 되면 그를 나데와 짝지어, 고구려 회복을 위해 출정해 있는 동안 그가 아내 나라를 도와 고구려 유민들을 보살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데와 아소미네의 결혼은 자모가 떠난 지 6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나라는 하나밖에 없는 딸 나데의 결혼을 남편 자모가 돌아온 후에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6년을 기다렸건만 남편 자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나데는 22살의 성숙한 여인이 되었고 아소미네는 23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다. 당시의 풍속으로는 나데와 아소미네가 슬하에 아들딸 서넛쯤은 두어야 할 늙은 총각 처녀가 되어 있었다. 나라는 이제 결심을 굳혀야만 했다. 드디어 나데와 아소미네가 결혼을 하고 34년의 세월 동안 6명의 아이를 출산했으나 살아 남은 자식은 아들 둘과 딸 하나였다. 다행히 아들과 딸은 큰 탈 없이 자라 주었고, 어느덧 중년이 넘어선 아소미네는 나라를 도와 고구려 유민들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날 아소미네가 나라에게 물었다. 그사이 고구려 포로 1세대들은 대부분 먼 이국땅에 뼈를 묻었지만 아직 몇몇이 80을 넘긴 나이로 살아 남아 각 부족의 장로격으로 있었다. 그들도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지난 40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소. 차라리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가다가 도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나라를 찾아갑시다." 나이가 든 마을의 장로들은 갈수록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곳에 가서 뼈를 묻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있는 북쪽 산허리에다가 가매장해 놓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뼈를 추려서 고구려 땅으로 가져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7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옹골차게 자리잡은 그들의 희망이었고 신앙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낮선 타국 땅에서 죽는 것은 죽음도 아니라고 했다. 죽어서도 자기네들의 첫 번째 할아버지 으사(환웅)나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있는 하늘나라에 오르지도 못하고 원귀가 되어 이국 산하를 헤맬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임종할 때는 으레 고구려가 있는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아- 고구려!"를 탄식하듯 토해 냈다. 물론 그들이 남긴 유언은 한결같이 고구려가 있는 북쪽산에다 묻어 주고 어느땐가 고구려로 돌아가는 날이 오면 자기네들의 뼈라도 고향 땅에 옮겨 달라는 애절한 것이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은 것 같소."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원로 나라가 좌중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곳에 모인 열대여섯 명의 지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라에게 쏠렸다. "만약 ... 그간 고구려가 다시 나라를 되찾았다면, 40년 동안이나 소식이 두절될 까닭이 없지 않소?" 나라의 말에 좌중은 너나없이 침묵을 지켰다. 고구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오매불망 모두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을 해보면 자모의 광복군이 고구려로 가서 나라를 다시 되찾았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자기네들을 중국 남부의 오지에 그냥 버려둘 까닭이 없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이대로 앉아 더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모두들 착잡한 심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아소미네가 좌중의 뜻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나라에게 물었다. 나라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도 드디어 움직이는 듯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라의 뜻밖의 한마디는 좌중의 분위기를 팽팽한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잠시 후 입을 연 것은 아소미네였다. "그렇다면?" "우선..." "예?" 모두들 나라의 얼굴을 쳐다보며 숨을 죽였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 고구려로 돌아간다는 오매불망 단 한마디의 말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다. "먼저 주변 정세를 좀 살핍시다. 우리말고도 다른 곳으로 끌려간 고구려 포로들을 수소문해서 찾는 것이오. 어쩌면 그들은 고구려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만약 그 일이 불가능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백발에 허연 수염을 한 온수곤수가 자마우치 영감에 뒤이어 물었다. "그때는 고구려로 가서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어요. 우선 그쪽 상황이 어떤가를 알고 나서 결정할 문제라고 봐요. 일단 바깥 세상으로 사람을 보내 봅시다." 그 같은 결정만으로도 모두들 가슴이 고동쳐 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지난 40년은 죽은 세월이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아버지, 남편, 자식들이 자모를 따라 고구려 광복군으로 출정한 후 40년의 세월을 기다림으로 살았고, 이제는 그들이 돌아오리라는 한 가닥의 희망마저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바깥 세상으로 내보낼 두 사람이 결정되었다. 한 명은 나데의 남편 아소미네였고, 그를 따라갈 사람은 을지상수의 아들 을지마사였다. 을지마사의 선대는 살수에서 침입해 오는 수나라의 100만 대병을 몰살시킨 을지문덕 장군이고, 또 자모의 원정군에 부장으로 따라간 을지사영의 손자였다. 을지사영이 떠난 후 을지상수가 유복자로 태어났고 을지상수는 또 외아들 을지마사를 낳았다. 을지마사는 기골이 장대해 날 때부터 아주 애를 먹였다. 임신 한지 열두 달만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산모는 용을 쓰다가 탈진해서 자지러지고, 한식경 후에 다시 기운을 차려 또다시 사경을 헤맨 끝에 돌 지난 어린애 만큼이나 큰 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허우대가 큰 을지마사는 크면서도 남달랐다. 여섯 살 때부터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농사일을 거드는 등 어른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래서 인근에서는 모처럼 장사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구경꾼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어린 을지마사는 또한 심성이 착하고 의협심이 남달라 동네의 ㄱ은 일은 도맡아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을지마사가 열다섯 되던 해 표범 한 마리가 정글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마을 사람을 물고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을지마사가 뒤쫓아가 달아나는 표범의 꼬리를 붙잡아 공중제비를 몇 바퀴 돌린 다음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와하!" 그 광경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해 가을 우기가 지났는데도 때아닌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일어났다. 산꼭대기에서 큰 바윗돌 하나가 마을을 향해 굴러내려 까딱하면 마을이 쑥밭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을지마사가 혼자서 굴러내리는 바윗돌을 막아 마을을 구했다. 을지마사는 18살로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의 힘과 기개를 믿고 아소미네를 따라가도록 선발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번 일로 온 고구려 유민 사회가 활기를 되찾았다. 사람들마다 싶은 시름에서 벗어난 듯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두 사람만 만나도 고구려로 되돌아가는 화제로 시끌벅적했다. 사실 그들의 시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멈춰져 있었다. 그사이 바깥 세상은 많은 변화를 맞았다.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고종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고종에게는 아름답고 영특한 왕비가 있었다. 애초에는 고종의 아버지 당태종의 첩이었던 무씨는 아름다움에 반해 그날로 궁중으로 데리고 와서 비로 삼아 버렸다. 무씨는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성질이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래서 천하를 호령하는 당고종도 평생을 엄처시하에서 살았는데, 종당에 이 왕비는 정치에도 관여하여 660년경에는 당고종을 조정하여 정치의 실권을 휘둘렸다. 사실 백제가 2대 당태종에게 망했다면 고구려는 당시 당나라 조정의 실세였던 당고종비 무씨에 의해 망한 셈이었다. 이 당고종비는 남편 고종이 죽자 690년에 그 뒤를 이었던 자기의 친자식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퇴위시키고, 나라 이름을 주라고 고치고 스스로 성신황제(측천무후)라고 불렀다.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붙들려온 것이 670년이니 고종비 무씨가 당나라 황제가 된 것은 그 20년 후의 일이었다. 즉 자모가 고구려를 회복하겠다고 광복군을 데리고 출전할 무렵 그녀는 황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고종비 성신황제가 늙어 판단이 흐려지자 조정 대신들은 705년, 자기의 친어머니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던 중종을 다시 세우고, 710년에는 중종에 이어 퇴위되었던 예종을 세워 2년이 지났다. 그런 곡절을 겪고 나서 저 절세의 미인 양귀비와 안녹산의 난리로 유명한 현종이 712년 왕위를 계승했다. 따라서 주강 남쪽 동자부 부근의 오지에 정착해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주변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아소미네 등 두 사람을 바깥 세상에 내보낸 것은 744년, 즉 당나라 현종이 보위에 오른 지 32년이 지나 있었다. 고구려 유민 1세대들이 씨앗을 가져와 심은 봉숭아꽃이 토담 밑에 소담하게 핀 늦봄 어느 날, 주강에서 출발한 아소미네는 아내 나데와 단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아버지 자모가 한번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 나라가 살아 있는 망부석이 되었고, 또 이번에는 남편 아소미네와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생이별을 하는 나데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여보..." 마을을 돌아 막 티크나무 숲속으로 사라져 가는 남편 아소미네를 부르며 나데는 맨발로 뒤쫓아 갔다. "여보..." 나데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그러나 앞서가는 두 사람은 그 울부짖음을 못 들었는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허겁지겁 뒤를 쫓아가던 나데는 그만 제풀에 넘어져 땅을 치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소미네는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숲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 아소미네의 볼 위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아소미네와 나데는 또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 2권에 계속